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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9, 2011

korean policemen in amalgamated period 併合時代の朝鮮の警察官

http://www.tamanegiya.com/nonnbee21.2.html


the lie in Mainichi newspaper

i found the article expressed "in war air raids on Tokyo, two Korean bereaved families come to Japan, tracing footprints disappeared in" on Mainichi newspaper.

<64 years ago and now, Mr. Huang has almost no memory of his father, he had lost only one left picture. Meanwhile, according to Mr. Kim, Mr. Hoseki said "i will come back soon.i will give to buy a school bag," leaving his home of South Korea and be taken to Japan, he did not come back.
Mainichi newspaper 11 February 28

Mainichi newspaper as a brazen liar disguised with writing that it was fact that "Contest to kill 100 people using a sword" without hesitation.

In Korea, the police officer system was that police administration →police superintendent→  police inspector→ policeman→ policeman assistant,in korea.
The percentage of Japanese and Koreans policemen in the end of 1910 nearly annexed with japan was as follows.

Director affairs official super intendent inspector Policeman policeman assistant total
Japanese 13 2 30 167 2053 0 2265
Korean 0 1 14 101 181 3131 3428
total 13 3 44 268 2234 3131 5693



"Korea forges history" Author Yatsuhiro Nakagawa, Tokuma books
(Nakagawa quotes from  "Finance in Commissioner of Government period," Yuho kyokai p122)

basically, senior position of police officers and 30 percent of superintendents were Korean. Although it was same for government clerk, it meaning that the criticism to Japan that "Rule by the Japanese police" is out of the point. In this way even just starting on the annexation period, you can understand that Korea had own rule, one-third of police executive and officers were Korean, they followed Japanese police inspector and policemen.In addition, also it is a mistake that only the margin police were Koreans.
Koreans say to lie that Japanese forced military government.


이규완 Lee Gyuwan ( 李圭完, 1862∼1946 ).

In Korea had thirteen provinces,, about 40 percent of post-governors were Korean. (When the war ended,it was 50%)
For example, post-governor of Gangwon-do were all Koreans, from first governor; Lee Gyuwan until the end of the war last governor;Son Yong-kyu.
Total number of 125 people the thirteen prefecture governor were 76 Japanese and 49 Korean governor, Korean governors were accounted for 39% during Japanese occupation.
Incidentally, the parliamentary councilor should be called a special deputy governor who had the mission to advise and hear from the request of Korean people, directly linked to governor were all of Koreans in thirteen provinces.


毎日新聞のウソ記事
2月28日土曜日晴れ ○
今日の毎日新聞に「東京大空襲 韓国から2遺族来日 戦火に消えた足跡たどる」という記事の中に下記のような表現がありました。
<64年前とあって、黄さんは父の記憶がほとんどなく、1枚だけ残っていた写真も紛失してしまった。一方、金さんによると、鳳石さんは「すぐ帰ってくる。ランドセルを買ってきてあげる」と朝鮮半島南部の自宅を出て、そのまま日本に連れていかれ、帰ってこなかったという。>
2月28日11時28分配信 毎日新聞

ありもしない百人切りをあったと偽る鉄面皮の毎日新聞らしく、さらりとウソを書いている。

朝鮮半島においては、警察官は、警務官→警視→警部→巡査→巡査補となっていたが、併合間も無い一九一〇年末における日本人と朝鮮人との割合は下記の通りであった。

 
警務部長
警務官
警視
警部
巡査
巡査補
合計
日本人
一三 
三〇
一六七
二〇五三
二二六五
朝鮮人
〇 
一四
一〇一
一八一
三一三一
三四二八
合計
一三
四四
二六八
二二三四
三一三一
五六九三 


「歴史を偽造する韓国」中川八洋著徳間書店
(中川氏は「総監府時代の財政」友邦協会p一二二より引用)

つまり、上級職である警務官と警視の三割は朝鮮人であった。これは先の官吏について同じ事であるが、日本の朝鮮統治が「日本の警察による支配」といく批判が的外れ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このように、併合間も無い時期ですら警察幹部の三分の一が朝鮮人であり、その朝鮮人幹部の下に日本人警察官の警部、巡査がついていた事がわかる。また、警察の末端だけが朝鮮人であったということも間違いである事がわかる。
武断政治といわれている我国の朝鮮統治がウソである事が良くわかる。

朝鮮には一三の道(県)があり、知事ポストの約四割が朝鮮人でした。(終戦時には五)
例えば、江原道の知事ポストは李圭完から終戦時の孫永穆まですべて朝鮮人でした。一三道の日本統治時代の全知事総数一二五名のうち日本人知事は七六名、朝鮮人知事は四九名と三九%が朝鮮人が占めていました。 ちなみに、知事に直結して朝鮮の民情をすくいあげ具申する任務の特殊副知事ともいうべき参与官は一三道すべてが朝鮮人でした。

慶尚北道の一九三二年(昭和七年)一月現在の県知事は朝鮮人であり、四名の部長(内務部、産業部、財務部、警察部)のうち産業部長は朝鮮人。そして、四つの部にいた部長以外の日本人官吏は一九四名。つまり、三名の日本人部長もその他一九四名の日本人官吏も、朝鮮人知事に仕えていた。
一九四〇年の朝鮮総督府における朝鮮人高級官吏の実態として  内務局には局長以下三一名の高級官吏のうち三名が朝鮮人。財務局は局長以下一三名のうち一名が朝鮮人。学務局は局長以下一九名のうち三名が朝鮮人であった。学務局の三名の朝鮮人高級官吏のうち一名は視学官という高官であった。
その他の例として京城履審法院の一三名の判事のうち二名が朝鮮人、京城地方法院二八名の判事のうち三名が朝鮮人、京城地方法院検事局の検事一四名のうち一名が朝鮮人であった。

学務局の最高ポストである学務局長として李軫鎬が一九二四年から二九年まで就いている。
朝鮮半島における地方行政機構は、道知事の下に、日本の市にあたる府、日本の町と村にあたる邑と面、邑と面を統括する郡があった。一九一七年において、一四府、一二八郡、五一邑、二三七四面であった。済州島と鬱陵島のみ島庁をおき、島司を任命していた。この島司は郡守と同格であった。
準・議会が道、府、邑にそれぞれあり、一九三一年(昭和六年)より府会、邑会、一九三三年(昭和八年)より道会といった。議長はそれぞれ道知事、府伊(市長)、邑長が兼ねるために完全な三権分立的な議会でないが、議決機関であった。村にあたる面の面協議会は諮問機関であり、準々・議会といってもよいものであった。

道会議員の三分の一の議員は官選、三分の二の議員は、府会、邑会、面協議会の議員が選挙した。道会議員の内訳は日本人が四分の一、朝鮮人が四分の三がおおむね基準であった。
例えば、一九三二年における京幾道の道会議員三七名中、日本人は一〇名で朝鮮人が二七名であった。
このように朝鮮半島における地方議員の多くは朝鮮人であり、朝鮮人対日本人というような多数決になれば日本人は敗れるしかなかった。
郡守、邑長、面長は、ほぼすべて朝鮮人であった。(郡守、邑長にごくわずかの例外あり)

朝鮮半島に移民してきた日本人は朝鮮人の郡守、邑長、面長の統治下にあったといってよい。

このような状態で、強制連行が行う事ができたと思う方が狂っている。

朝鮮半島における在日本人は特権というものが無かった。一九三七年より配給制と朝鮮半島もなってきたが、塩、砂糖などの配給で日本人と朝鮮人との差別はなかった。キムチのために朝鮮人に塩を多くし、日本人には砂糖を多くするなど公正な調整がされていた。
配給の行列ですら日本人、朝鮮人の区別なく一緒に並んだ。

参考文献
「歴史を偽造する韓国」中川八洋著徳間書店
「別冊一億人の昭和史 日本陸軍史」毎日新聞社昭和五四年刊
「月刊正論」平成一五年三月号 p五二~五三

このような朝鮮半島統治下において、毎日新聞のこの記事にあるような<「すぐ帰ってくる。ランドセルを買ってきてあげる」と朝鮮半島南部の自宅を出て、そのまま日本に連れていかれ、帰ってこなかった>などということは絶対にありえない。
もし本当に、このような統治体制において、朝鮮人がいうような「強制連行」が日本人により行われ、それを朝鮮人の知事、議員、官吏が平気で座視していたのなら、朝鮮人は単なるアホ以外の何ものでもない。
何度も書くが、このような統治下において毎日新聞の記事にあるような事などがおこなわれる可能性はゼロである。
いかに、朝鮮人が平気でウソをつくことができるかよくわかる記事です。

Professor Nakagawa 筑波大学教授中川八洋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의 거짓말 기사 2월28일 토요일맑음 0오늘의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에 「도쿄(東京)대 공습 한국에서 2유족방일 전화에 사라진 발자국 더듬어 간다」라고 하는 기사 안(속)에 아래와 같은 표현이 있었습니다.
<64년전으로 있어서, 황씨는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고, 1장만 남아있었던 사진도 분실해버렸다. 한편, 김씨에 의하면, 오토리(鳳) 이시(石)씨는 「바로 돌아온다. 책가방(satchel)을 사 와 드린다」라고 한반도(朝鮮半島) 남부의 자택을 나가고, 그대로 일본에 데려가게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한다. > 2월28일11시28분 전송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

개미도 하지 않는 100명 한정을 있었다고 속이는 철면피의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답게, 산뜻하게 거짓말을 쓰고 있다.

한반도(朝鮮半島)에 있어서는, 경찰관은, 경무관→경시→경부→순경→순경보가 되고 있었지만, 병합 얼마 안되는 1910연말에 있어서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비율은 하기 대로이었다.


경무부장 경무관 경시경부순경순경보 합계 일본인 13230167205302265조선인 011410118131313428합계13344268223431315693


「역사를 위조하는 한국」나카가와(中川) 야쓰히로(八洋) 저 도쿠마(德間) 서점(나카가와(中川)씨는 「총감부(府)시대의 재정」우방협회p122보다 인용)

즉, 상급직장인 경무관과 경시의 3할은 조선인이었다. 이것은 전번의 관리에 대해서 같은 일이지만, 일본의 조선 통치가 「일본의 경찰에 의한 지배」라고 가는 비판이 빗나간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병합 얼마 안되는 시기로조차 경찰간부의 3분의 1이 조선인이며, 그 조선인 간부 밑에 일본인경찰관의 경부, 순경이 딸려 있었던 것을 안다. 또, 경찰의 말단만이 조선인이었다라고 하는 것도 틀림인 것을 안다.
무단정치라고 말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조선 통치가 거짓말인 것이 자주(잘) 안다.

조선에는 13의 미치(道) (현)이 있어, 지사 포스트의 약4할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종전 때에는 5) 예를 들면, 강원도(江原道)의 지사 포스트는 이(李) 게이(圭) 다모쓰(完)에게서 종전 때의 손(孫) 히사시(永)穆까지 모두 조선인이었습니다. 13도의 일본 통치 시대의 전지사총수 125명 가운데 일본인지사는 76명, 조선인 지사는 49명과 39%이 조선인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지사에게 직결해서 조선의 민정을 떠 올려 상세히 진술하는 임무의 특수부지사라고도 말해야 할 참여관은 13도 모두가 조선인이었습니다.

경상북도(慶尙北道)의 1932년(쇼와(昭和)7년) 1월 현재의 현 지사는 조선인이며, 4명의 부장(내무부, 산업부, 재무부, 경찰부) 가운데 산업부장은 조선인. 그리고, 네개의 部에 있었던 부장이외의 일본인관리는 194명. 즉, 3명의 일본인부장도 기타 194명의 일본인관리도, 조선인 지사에게 시중들고 있었다.
1940년의 조선 총독부에 있어서의 조선인 고급관리의 실태로서 내무국에는 국장이하 31명의 고급관리 가운데 3명이 조선인. 재무국은 국장이하 13명 가운데 한명이 조선인. 학무국은 국장이하 19명 가운데 3명이 조선인이었다. 학무국의 3명의 조선인 고급관리 가운데 한명은 시학관이라고 하는 고관이었다.
기타의 예 로서 교토성履審법원의 13명의 판사 가운데 후타나(二名)가 조선인, 교토성지방법 원 28명의 판사 가운데 3명이 조선인, 교토성지방법 원검사국의 검사 14명 가운데 한명이 조선인이었다.

학무국의 최고 포스트인 학무국장으로서 이(李)軫칼날과 칼등 사이의 조금 볼록한 부분이 1924년부터 29년까지 오르고 있다.
한반도(朝鮮半島)에 있어서의 지방행정기구는, 도지사 밑에, 일본의 시에 맞는 부(府), 일본의 도시와 마을에 맞는 읍과 면, 읍과 면을 통괄하는 군이 있었다. 1917년에 있어서, 14부(府), 128군, 51읍, 2374면이었다. 제주도(濟州島)와 울릉도만 섬청을 두고, 시마(島) 쓰카사(司)를 임명하고 있었다. 이 시마(島) 쓰카사(司)는 군지기와 동격이었다.
준(準)·의회가 길, 부(府), 읍에 각각 개미, 1931년(쇼와(昭和)6년)보다 부(府)회, 읍회, 1933년(쇼와(昭和)8년)보다 길회라고 했다. 의장은 각각 도지사, 부(府)伊(시장), 읍장이 겸하기 위해서 완전한 3권분립적인 의회가 아니지만, 의결 기관이었다. 마을에 맞는 면의 면협의회는 자문 기관이며, 준준·의회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길회의원의 3분의 1의 의원은 관선, 3분의 2의 의원은, 부(府)회, 읍회, 면협의회의 의원이 선거했다. 길회의원의 내역은 일본인이 사분의 1, 조선인이 사분의 3이 대체로 기준이었다.
예를 들면, 1932년에 있어서의 경기도(京幾道)의 길회의원 37명중, 일본인은 10명으로 조선인이 27명이었다.
이렇게 한반도(朝鮮半島)에 있어서의 지방의원의 대부분은 조선인이며, 조선인 대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 같은 다수결이 되면 일본인은 지는 수 밖에 없었다.
군지기, 읍장, 얼굴이 갸름함은, 거의 모두 조선인이었다. (군지기, 읍장에 지극히 얼마 안된 예외 있어)

한반도(朝鮮半島)에 이민해 온 일본인은 조선인의 군지기, 읍장, 얼굴이 갸름함의 통치 아래로 있었다고 해도 좋다.

이러한 상태로, 강제 연행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미쳐 있다.

한반도(朝鮮半島)에 있어서의 재일본인은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 1937년보다 배급제와 한반도(朝鮮半島)도 되어 왔지만, 소금, 설탕등의 배급으로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차별은 없었다. 김치를 위해서 조선인에게 소금을 많게 하고, 일본인에게는 설탕을 많게 하는등 공정한 조정이 되고 있었다.
배급의 행렬에서조차 일본인, 조선인의 구 구별없이 함께 나란히 섰다.

참고 문헌 「역사를 위조하는 한국」나카가와(中川) 야쓰히로(八洋) 저 도쿠마(德間) 서점 「별책 1억명의 쇼와(昭和)사 일본 육군사」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사 쇼와(昭和)54연간 「월간정론」헤이세이15년 3월호 p52∼53

이러한 한반도(朝鮮半島) 통치 아래로 두고,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의 이 기사에 있는 것 같은 <「바로 돌아온다. 책가방(satchel)을 사 와 드린다」라고 한반도(朝鮮半島) 남부의 자택을 나가고, 그대로 일본에 데려가게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이러한 통치 체제에 있어서, 조선인이 말하는 것 같은 「강제 연행」이 일본인에 의해 행하여져, 그것을 조선인의 지사, 의원, 관리가 태연하게 좌시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조선인은 단순한 바보천치이외의 무슨물건이라도 아니다.
몇번이나 쓰지만, 이러한 통치 아래로 두어서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의 기사에 있는 것 같은 것등이 해질 가능성은 제로다.
아무리(어떻게), 조선인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찌를 수 있을지 자주(잘) 아는 기사입니다.

Professor Nakagawa 쓰쿠바대학(筑波大學) 교수 나카가와(中川) 야쓰히로(八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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