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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10, 2012

Kisaeng's 妓生 sword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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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0 16:49:01조회 (242) | 추천 (0) | 퍼간사람
Kisaeng to perform a geom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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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김태연
검무劍舞는 전쟁의 춤이다. 칼을 휘둘러 적장의 목을 베고, 승전을 축하하는 춤사위가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적진에서 죽은 화랑을 달래는 춤에서 시작된 검무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져, 한반도 곳곳에 다양한 색채를 지닌 검무를 낳았다. 그중 진주 검무晋州劍舞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희되던 검무의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글 차태란(자유기고가) 사진 임승수(사진가)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김태연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김태연 선생(63)을 진 주성 촉석루에서 만났다. 선생은 촉석루 누각에서 열리는‘무형문 화재 토요 상설 공연’에 오를 채비로 분주했다. 지난 2008년 진주시 에서 전통 예술 저변 확대를 위해 상설 공연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 래, 선생은 진주검무보존회 회원들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진주검무 를 꾸준히선보여왔다. 4월에서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촉 석루를 찾으면 중요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를 비롯하여 경남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한량무閑良舞, 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등 무형문화 재 여섯 종목의 연행을 감상할 수 있다.

여덟 명의 무용수가 호흡을 맞춰 칼사위를 뿜어내는 호방한 군무 群舞인 진주검무가 펼쳐지자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터져나왔다.

‘잘한다’를 연호하는 백발의 노인부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관객들이 진주검무 공연에 빠져들 었다. 진주성을 찾았다가 우연히 공연을 보게 된 관광객들은 뜻밖 의 선물에 더욱 더 즐거워했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이들은 진주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은 셈이 다. 예로부터 진주 감영監營은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촉석루에서 연 회를 베풀었고, 감영에 속해 있던 교방청(敎坊廳, 기생들이 기예를 익히던 곳) 최고의 예기藝妓들을 불러 진주검무를 선보였다고 한다.

검무에 매혹된 선비들은 흡족한 마음을 시문時文에 담았다. 조선 후 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도 진주에서 벼슬을 하던 장인을 찾아왔다가 검무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이라는 시를 남겼다.‘한 칼은 땅에 두고 한 칼로 휘두르니, 푸른 뱀이 백 번 이나 가슴을 휘감는 듯’이라는 시 구에는 진주검무의 서늘한 아름 다움이 절절히 녹아 있다.

김태연 선생은 이 아름다움이 오늘날 진주검무를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 란다. 수년 동안 촉석루 공연에 오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 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검무로 찾은 인생, 검무의 맥을 잇는 데 바치다

공연을 마친 선생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검무는 한 번의 공연 에도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체력 소모가 크다. 느리면서도 긴장이 계속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춤사위가 많기 때문. 하지만 선생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공연 전까지 먹은 음식이라고는 약간의 과일이 전부라는데도 그러했다.

“공연 전에는 힘을 낼 수 있을 만큼만 가볍게 먹습니다. 배가 부 르면 몸이 가뜬하지 않지요. 긴장이 풀어져 춤도 느슨해지는 것만 같고요.” 30여 년 동안 검무를 추었고, 2010년에는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누구나 인정하는 명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춤에 있어서는 엄격함을 풀지 못하는 선생. 작게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에서부터 근본적으로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까지, 생활 자체를 검무에 맞게 엄격히 다스려야 제대로 된 춤이 나온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다.

“스승님(성계옥,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2009년 사망으로 지정 해 제)께서 참 엄격하셨어요. 다정한 성품이지만 검무에 대해서는 절 대 봐주시는 법이 없었지요. 평소의 몸가짐이나 마음가짐도 곧게 하라고 하셨어요. 인성이 고와야 춤이 곱다는 말씀을 늘 강조하셨 습니다.” 스승의 가르침 덕분일까? 돌아보면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는 검무 인생이었다. 1984년 취미로 장구를 시작했다가 우연히 검무를 접했다. 진주와 가까운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진주로 시집 와 살았으니 진주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진주검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주검무를 처음 접하는 순간 운명처럼 끌꺸 는 힘을 느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내성적 인 성격이었던지라 춤에, 그것도 칼을 들고 추는 춤에 끌리는 자신 이 놀라웠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만큼 가라앉았던 삶이 검무를 추면서 살아나자 춤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1986년에 전주시립국악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진주검무를 배 웠다.

“재주가 있었는지 3년 만인 1989년에 진주검무 이수자가 되었고, 1990년도부터는 전주시립국악학교에서 강사 노릇도 했어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했지요. 그런데 갈수록 진주검무를 계승?야 한 다는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부드럽고도 강한 진주검무의 매력

선생에게는 전승에 대한 사명감은 물론이고 진주검무만의 빼어난 예술성을 알려야 한다는 숙제도 컸다.

“진주검무는 인위적인 기교가 없는 춤입니다. 스승님은 움직임 은 태산같이, 미소는 부처님같이 지으라 하셨죠. 은은한 내면의 멋 이 드러나는 것은 진주검무만의 특징입니다.” 선생의 말처럼 진주검무에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 진주검무 는 다른 지역의 쮰무와는 달리 칼자루의 목이 꺾이지 않은 일자형 검을 쓴다. 따라서 손목 놀림이 직선적이며 절도가 있다. 호남검무 나 통영검무가 섬세하고 여성적이라면, 진주검무는 웅장하고 남성 적이다. 또한 진주검무에는 굳센 힘을 지긋하게 눌러 은근하게 표현 하는 멋이 있다. 검 대신 한삼을 손에 끼고 느린 춤사위를 펼치는 ‘한삼사위’는, 대륙적인 힘을 그대로 표현하는 평양검무에서는 찾 아볼 수 없는 대목이다.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오므렸다가 탁탁 튕 겨내는‘깍지떼기’등 화사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춤사위는 전통 정 재무呈才?의 모범 답안을 보여준다.

이는 진주검무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행되던 검무 형태를 완벽 하게 보존했기 때문에 드러나는 특징이다. 임금께 바치는 춤인 정재 무로서의 검무는, 번뜩이는 검이 지닌 날것의 느낌을 가리는 고상함 을 갖추어야 했다. 진주검무는 조선 말 장악원(掌樂院, 궁중의 음악 과 무용을 담당했던 기관)에 소속되어 검무를 추던 최순이 선생 (1884~1969)의 노력으로 궁중 검무의 원형을 지킬 수 있었다. 최순이 선생이 1967년 진주검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까지도 후진 양성에 힘쓴 덕에, 선생의 제? 여덟 명이 최초의 진주검무 예 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예능보유자들은 연로해지고, 진주검무를 배 우겠다는 사람도 급감하니 김태연 선생이 느끼는 중압감이 커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후대를 가르칠 선생이 되려면 제 스스로가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에서 전 통무용도 배웠지요.” 중졸 학력이 전부였던 선생은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등록하여 고등학생이던 딸과 함께 공부를 했고, 2000년에는 경상대 학교 민속무용학과에 들어갔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식구들이 먹 을 밥을 짓고, 다음 날 새벽 한두 시까지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는 연습이 과해서 발등의 뼈 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힘들어서 쓰러지거나 건강을 해치지 는 않았다.하고 싶은 일을 하니 절대 힘에 부치지 않았다.

노력은 정직한 결과를 낳아 2006년에는 진주검무 전수교육조교 로 인정을 받았고, 2010년에는 진주검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4년 예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진주검무의 전승을 위해 결성된 진 주검무보존회 활동에도 열성을 다했다. 내리막길을 걷던 회원 가입 추세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증가세로 돌아섰다. 2011년 현재 80 여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진주검무 전승을 위해 춤사위를 벼르고 있으니, 진주검무 공연을 위해 필요한 여덟 명을 빠듯하게 채우던 1990년대 초반에 비하면 참으로 많은 성과를 이룬 것이다.
기녀의 춤, 나이 든 춤이라는 편견을 깨다


문득,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서 높은 벽이 있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바로 진주검무가‘ 생춤’이라는 편견이었다. 진주검무는 진 주 교방의 기생들을 통해 전수되어왔다. 과거 전통 예술이 교방을 통해 생산되어 향유되었고, 기생들 또한 단순 창기娼妓가 아닌 빼어 난 예술성으로 무장한 예기藝妓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방에서 꽃핀 전 통문화를 폄하하는 시선은 늘 있어왔다. 더구나 진주검무는 논개라 는 걸출한 의기義妓의 영전에 진주의 예기들이 바치던 춤이었으니, 지조와 충절이 춤사위마다 넘칠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마저 없을 텐데도 그러했다.

“과거에는 그런 시각 때문에 힘들었지요. 처음 춤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공연을 가면 관객들이‘ 기생이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어 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교방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 이지요. 생각이 많이 트인 것 같아 뿌듯합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 어요. 나이 든 무용수에 대한 그릇된 시각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촉석루 공연에 오른 여덟 명의 무용수 나이는 대부분 50대를 웃 돈다. 진주검무보존회 회원들도 대부분이 중년 여성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야 춤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도 있다. 일찍부터 검무를 시작하는 젊은 무 용수가 많아야 전승에 대한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 성된 춤만을 놓고 보면 나이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진주검 무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진주검무는 내면을 끌어내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량만 좋 은 젊은 무용수보다는 검무를 오래 춘 원숙한 무용수의 춤이 더 아 름답습니다. 5년은 익혀야 따라 하는 정도이고, 깊은 맛을 표현하려 면 20년 정도가 필요해요. 하지만 관객들은 먼저 나이를 묻고 마음 의 문을 닫아버려요. 이런 편견이 아주 무섭습니다.”
진주검무의 유네스코 등재를 꿈꾸다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진주검무보존회의 회장직도 맡으면서 선생은 더욱더 바빠졌다. 춤만 추는 것이 아니 라 시야를 넓혀 진주검무를 널리 알리는 활동에 매진해야 하기 때 문이다. 수십 년 전부터 검무의 길을 나란히 걸으며 2010년 진주검 무 예능보유자로 함께 지정된 유영희 선생이 곁에서 큰 힘이 되고 있다. 유영희 선생은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을 맡아 진주검무 활성화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있다. 다행히 평생교육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각종 교육원에서 강의 문의가 들어오고,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학교 측의 문의도 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할 때 가장 기쁘지요. 돈이 되기는 커녕 교통비를 들여가면서 쫓아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다하 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전통문화를 익혀야 마음에 확실하게 남으니 까요.” 진주검무는 예절의 춤이다. 춤을 배우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예절을 배우고 전통의 단아함을 익힌다. 또한 ?덟 명이 함께 추는 특성 때문에 함께 어울리는 협동심도 배우게 된다. 검무를 배우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공부를 시켜야지 춤 은 안 됩니다”라며 손사래 치던 선생님이나 부모들의 생각도 확 바 뀐다고 한다. 선생의 바람대로 교육 과정에 비단 진주검무가 아니 라도 전통 기예를 익히는 내용이 들어간다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 모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지 않을까.

“최종 목표는 더 큰 곳에 있지요. 진주검무를 세계에 알리는 겁니 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노력해야지요. 해외에서 검무를 공연하면 모두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옷깃을 여미지 않고는 볼 수 없다며 숙연해하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검무를 우리만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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