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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ne 15, 2012

Hangan iron bridge bombing in 28 June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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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 6 ] 2008/10/15 09:51 추천 3 스크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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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의 軍史世界

한강철교는 알고 있다 [ 6 ]


희생만 야기한 작전

후퇴하는 부대가 적의 진격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 교량이나 주요 교통 시설물을 자의로 파괴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시도된 전술입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강교량은 한강의 남북을 유일하게 연결하는 전략시설물이었으므로 국군이 이를 파괴한 것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강교량 폭파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파괴된 한강인도교와 철교의 모습 ]

왜냐하면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가를 앞서서 보위할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제일먼저 다리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강하여 줄행랑 쳤습니다. 이른바 끝 발 순으로 서울을 빠져 나왔는데 더구나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당연히 서울에 남겨질 국민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 국민을 사지에 남겨놓고 위정자들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

오히려 국군이 선전하여 38선 너머로 공산군을 격퇴시키고 있다는 거짓방송을 계속 틀어 놓음으로써 서울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도 있을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시켰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리를 폭파 시킬 당시에도 시민들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폭파시켜 다리위에 있던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목숨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 항공 촬영된 폭파 직후의 한강 철교의 모습 ( C교만 파괴 되었습니다 ) ]

이 사건은 한강이북에 남겨진 많은 시민들과 미아리고개에서 최후의 방어를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국군을 순식간 공황에 빠뜨렸습니다. 더구나 전황을 오판하여 공산군이 서울시 외곽에 나타났을 무렵 서둘러 폭파를 하는 바람에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강북에 있던 많은 국군병력과 전투물자들이 유기되었습니다.


[ 한강교량의 파괴로 아군 주력과 장비의 퇴로가 막혔습니다 ]

북괴군이 서울 점령 후 대책 없이 허물어져 가던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도심에서 3일간 지체하였던 미스터리 같은 이유를 이전에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시도한 한강다리폭파를 이유로 들었지만 현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북괴군이 서울 점령 후 진격을 멈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북괴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 하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청성부대와 오뚜기부대의 분전으로 전선이 단절되어 이를 메우기 위해 기다리게 되었다는 의견 ( 관련글 참조 ), 그 동안 남한에 내재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괴군의 역량 문제로 부대 재편과 보급을 하기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는 의견, 남한 정부의 투항을 유도하기위해 시간을 주었다는 의견 등등이 있습니다.


[ 한 때 교량 파괴를 북괴군 지체의 이유로 들기도 하였습니다 ]

한강다리폭파가 이러한 이유에 더 이상 거명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비록 빈약하지만 북괴군이 나름대로 도강장비가 있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이었고 이런 예는 김포반도로 한강을 넘어와 영등포, 시흥방면으로 진격한 북괴군 제6사단의 예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 파괴되지 않은 A 철교로 도강하는 북괴군 기갑부대 ( 上 )
1950년 6월 30일 미 파괴 교량을 폭격하는 미군의 작전모습 ]

그 보다 확실한 증거는 한강철교-인도교 폭파작전 당시 한강 철교 C교와 인도교 폭파는 성공하였지만 철교 A교와 B교는 폭파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북괴군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도하할 통로를 국군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들 A, B교가 파괴된 것은 이후 UN 군의 공습에 의해서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http://dae6.tistory.com/115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 1 - 한국전쟁의 발발
Posted at 2009/01/05 10:20 Filed under 기획,시리즈/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


- 2009년 신년특집으로 민병설 연구위원님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됩니다.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발발

2009년은 한국전쟁 발발 60년째 되는 해이다. 열네살 철부지가 60년전에 겪었던 공포와 기아의 전쟁중 아픈 기억들을 더듬어 적어내는 일은 빛바랜 '퍼즐'조각을 찾아 맞추는것 처럼 시작부터 쉬운일이 아니여서 며칠을 헤멨다.


또렷한 듯 희미한 기억속에 1950년 6월 그해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이른 장마속 눅눅한 습도로 찜통처럼 푹푹 쪄댔다.
해방 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일제치하처럼 서울은 식량배급제가 계속되었고, 3.8선에서는 남북간에 총성이 자주 오갔으며, 북에서 보내던 전기가 중단되고, 수없이 많은 단체들이 생겨나고, 좌우(左右)의 충돌이 잦았으며 아침이면 대문밖에 생소한 삐라가 뿌려져있었다. 많은 요인(要人)들이 암살되는가 하면,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대공산권 극동방어선을 필리핀과 오키나와로 물리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남북간 군사력의 균형을 잃게 되었다. 단전(斷電), 단수(斷水)마저 잦았던 때라 많은 서울시민들은 먹고사는 생존문제에 단순히 집착하는 소시민일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서울시내 곳곳에서 이동차량방송에서 나오는 숨가뿐 소리가 내게도 스쳤다.
"국군장병은 속히 귀대하라! 괴뢰군이 남침했다! 국군장병은 속히 귀대하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청천벽력이 아닌가? 모처럼 휴가나온 국방군(국방경비대)들이 긴장속에 귀대길에 오르고 있었다. 신문마다 호외(號外)를 뿌리고 라디오에서도 긴박한 소식을 전하니 어른들의 표정은 굳어져있었다.
"전쟁이 났단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 들어왔다!"
당시 3.8선 근방에선 가끔 총성은 있었지만 이번엔 '진짜' 전쟁이 터졌다! 6.25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어린 나로선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불안과 흥미(?)속에 밤잠을 설치며 하루 이틀이 지났다.


1950년6월25일 새벽4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내려오는 인민군


리승만의 거짓방송


6월26일부터 라디오에서 계속되는 방송은 리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노회한 목소리였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이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승만과 그의 내각은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이미 수원으로,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먼저 도망가며 소위 국부(國父)로 자처하던 리승만은 정동에 있던 HLKA 방송국을 통해서 녹음방송을 보내면서 서울시민들을 속였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리승만’으로 표기했고 영어로는 ‘Syngman Rhee’로 표기했었다.)




1950년당시의 리승만 대통령


인민군의 서울 입성


"동두천 까지 들어왔데!" "의정부까지 들어왔데!"
천둥번개가 치면서 이른 장마비가 억수로 퍼붓는데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서 불안이 자꾸만 부풀어 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호사가들은 밤잠을 설치면서도 새로운 뉴스를 동네방네 전하는 사람은 그 때도 있었다. 귀청을 째는 대포소리가 들리고 기관총의 가파른 소리가 들리더니 지축을 흔드는 탱크의 캐터필터 굉음이 무섭게 서울 시내를 깔아 뭉개면서 밤잠을 설친 시민들은 각자가 입을 다물고 군대 적령기의 젊은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동내 부인들과 할머니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한다.
"미아리까지 들어왔다!" "아냐! 창경원을 지나 구름다리도 지났단다!"


전쟁이 터지기 사흘만인 6월28일 아침에 포성과 총성이 가까이 들리더니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었다. 우리들은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다리를 구름다리라고 불렀다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서울을 끝까지 지킨 용감한 국방군


6월28일 새벽에 요란하게 대문을 두둘기는 소리에 모두가 곤한 새벽잠에서 깨었다.
해방후 함경도 청진에서 남하해서 우리집에 세들어 사는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 김○휘 소위가 군복에 수류탄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채로 노모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온것이다.
"어머니! 급하게 인사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지금 인민군 탱크를 까 부시러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충혈된 눈이지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와 힘찬 목소리로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황급히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참으로 애국심이 대단한 용기있는 국방군 소위는 효심도 깊은 젊은 청년이였다. 어린 나였지만 이렇게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야 전쟁을 실감했다. 아직도 총성이 따갑게 울리고 콩 볶듯한 기관총 소리가 점차 가까이 오는데 김소위의 노모는 아들이 떠난뒤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위를 빌고 빌면서 자식이 국방군임을 감추려 집에 남았던 군복들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후 소식이지만 김○휘 소위는 한강다리가 끊어진 뒤에 수영으로 한강도강에 성공했고 살아서 돌아왔다.




6.25때 폭파한 한강 인도교


한강 인도교/철교 폭파와 최창식 공병감


1950년 당시에는 한강에는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와 사람과 차량이 다니는 인도교(사진) 두다리뿐이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까지 3일이란 짧은 시간안에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리승만 대통령의 서울사수 방송을 믿고 있다가 극히 일부 고위층과 시민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인민군의 서울 입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서울근교까지 내려왔던 6월28일 새벽(2시30분경)에 한강철교는 국방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었다. 다리를 폭파한 시간 다리위에는 500명~8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고 차량 50여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더 많은 국방군을 한강이남으로 도하시키려는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고 해서 이 모든 책임을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지워 50년 9월 21일 부산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대령 그 부인의 항소로 1964년 무죄가 선언되었다. 당시 국방부장관은 신성모씨였고, 육군참모총장은 채병덕 장군이였다.
채병덕 장군은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을 면치 못한 채 부산 방어의 최전선에서 함정에 걸려 36세인 50년7월27일 인민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한강철교 폭파장면


Posted by 민병설























http://kongjuw2.kongju-e.ac.kr/~kongju/iyagi_12.htm


공주의 옛 모습


여기에 있는 자료는 충청남도 개도 100년 행사(1996.10.5)때 열린 "옛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들인데, 이를 "공주 옛 모습"이라는 사진첩으로 발간 한 것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자료를 제공해 주신 시청 공보담당관실 관계자 여러분과 사진과 관련된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은 사진을 클릭하면 원형크기의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공주의 근래모습









1960년대 공주읍 전경








1930년대 공주 중심지

봉황산 아래 충남도청을 중심으로 좌측이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 건물과 우측 멀리 곰나루 건너 연미산이 우뚝솟아 있다.
ㅇ표시가 충남도청이며 제민천을 따라 도로의 중심선이 선명하다.


1931년 도청 이전(대전으로) 반대 시위

1931년 3월 13일 충청남도 평의회(지금의 도의회)는 총독부의 충남도청 대전 이전 결의 사항을 인준할 계획이었다. 이를 알게된 공주 시민들은 3월 11인 부터 3월 13일 오전까지 횟불시위와 투석전을 벌이는 등 도청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게 되였다. 이때 시위 군중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경찰 300명을 동원 시위 가담자 50여명을 구속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위 사진은 시위로 구속된 50여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낸 후, 주민들이 도청 앞에서 석방농성을 하고있는 장면이다. 이런 와중에서 도청 이전은 결정되고 공주에 소재하던 도청은 대전으로 이전하게 된다.


1920년대 공주 중심지 풍경

길 옆에 세워진 자전거와 도로를 지나는 행인들의 모습, 한자로된 상호가 붙어있는 상가, 당시 중심가임을 알 수 있는 도로변의 전주들... 사진에 있는 모습들이 정겹다.(우측 자전거가 있는 쪽이 전 제일은행 공주지점 이었다.)


1920년대 충남도청 앞

대통교(大通橋)에서 도청(감영)을 바라본 모습이다. [현 공주대 부속고등학교 앞의 제민천다리(대통교)] 당시 이곳은 도청앞 중심 거리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성복점(洋服店)과 자전거포 등이 유명했으며 우뚝솟은 우측의 구전주와 좌측의 변압기가 달려있는 새 전주가 대조적이다.


1930년대 공주면 납세선전대

당시 농악대를 앞세워 납세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금강에서 물깃는 소년과 빨래하는 소녀

지금은 집에 수도와 세탁기가 없는집이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물을 길어 사용하고, 개천이나 강가에서 빨래하는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댕기를딴 소녀의 모습과, 물지게를 지고있는 소년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 사진은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촬영된것으로 보여진다.


1920년대 금강의 배다리

지금은 신관동에서 공주시내를 연결하는 다리가 둘이나 있지만, 다리가 놓여지기전 이 배다리를 이용하여 왕래 하였다.
30여척의 배위에 널판을 깔아 놓았으며 폭 3m정도에 길이는 무려 150m나 되었다고 한다. 양산을 쓰고 다리위를 건너는 사람과 배에서 무언가를 하고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1930년대 금강에서의 채빙

냉장고가 없던시절 겨울에 어름을 채취하여 보관하였다가 사용 했다고한다. 채빙 장소로는 청벽과 용못(소학동 삼거리) 사이였으며 어름을 보관하던 곳은 공산성의 성안 마을이었다고 한다. 멀리 배다리가 보이고, 채빙용 큰 톱을 들고있는 사람과 네모반듯하게 잘려진 어름이 보인다.


한국전쟁(6.25) 당시 금강교(구다리) 폭파장면과 끊어진 다리

한국전쟁(6.25) 당시 북괴가 한강 이남까지 남침하자 이를 저지 하기 위한 일환책으로 금강교(지금의 구다리)를 폭파 시켰다고 한다. 폭파당시의 시커먼 연기와 끊어진 다리가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내 중심부를 흐르는 제민천(濟民川)

지금은 제민천이 많이 오염되어 오가는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맑은 물이 흐르던 제민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물장구 치던 그때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아래서 발담그고 앉아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에게서 한가로움을 느낀다.



1900년초, 의병과 동학군을 수용하고 있는 공주 감옥

머리를 깍고 무릅꿇고 앉아있는 의병/동학군의 모습과, 제복을 입고 서있는 일경들이 보인다.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몇사진들중 하나이다.(현재의 교동 중앙장로교회 부근)





1930년대 도청내 신사

그 당시 도청내에서 신사참배 하는 모습이다. 암울했던 일제치하시의 모습들이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1925년 처음 발행된 금남일보

도청소재지인 공주에서 처음 발행되었던 신문이다.







개량된 보리파종 농기구로 시범파종

둥근 통속에 씨앗 보리를 넣은후 이를 굴리면 작은 구멍을 통하여 보리씨를 심게된다.





논에 물대기 작업










1927년의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충남 유일의 인문계 조선인 학교였다.(지금의 공주고등학교)






1928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운동회








1930년대 일제하의 학생군사훈련(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생)







1900년대 영명학당(지금의 공주영명고등학교)









공주영명 여학당 1회 졸업생








공주영명 남학당 2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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