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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ly 24, 2012

Kisaeng through the history


http://blogs.yahoo.co.jp/ynz98ynz/46400339.html

『ファン・ジニ』( 황진이)Hwang Jin-Yi

歴史のなかの妓生(キーセン)
2008/11/10(月) 午前 2:22「ファン・ジニ」雑記ドラマ番組


18世紀の画家、申潤福(シンユンボク)が描いた妓生の姿

ドラマや映画「ファン・ジニ」で日本でも注目を集める妓生(キーセン)ですが、意外にあいまいで、わからない部分が多いように思います。

そこで、韓国・高麗大学の学生新聞「高大新聞」に、妓生の歴史についてうまくまとめた記事がありましたので、翻訳してみました(小見出しと〔 〕内は訳者)。


芸術を花咲かせた“解語花(ヘオファ)”、妓生(キーセン)

歴史のなかの女性の足跡……日帝強占期に娼婦の意味に歪曲

at the long moon night in winter solstice, i cut it in two of bottom,
under the bed of spring breeze,i round it,
I will spread it soon at night my dear come.

冬至の月の長々し夜を 腰のところでふたつに切って
春風の布団の下に ぐるぐると巻いておき
愛しい方がいらした夜に そろそろと広げます

愛しい人を待つ女の切実な気持ちを、比喩に託したこの時調〔シジョ、朝鮮の定型詩〕は、歴代妓生のなかでも有名なファン・ジニ(黄真伊)の作品だ。賤民でありながら、今日までファン・ジニが優れた女流詩人として認められてきたのは、妓生という彼女の身分によるところが大きい。彼女たち妓生は、厳しい訓練を通じてパンソリ〔太鼓に合わせて物語を語る朝鮮の伝統芸能〕、伽?琴(カヤグム)、宮中舞などを学び、知識人男性を相手に芸術的才能を披露する知的能力を備えていた。


http://blog.daum.net/hsonata/16038500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시는 밤에 굽이굽이 펼쳐서 오래도록 함께 지내리라)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서리서리 뭉쳐서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시는 밤에 굽이굽이 펼쳐 내어 그 밤이 더디 새게 길게 길게 이으리라 밤의 한가운데를 허리라고 한 것도 기발한 착상이거니와 그것을 베어 낸다고 한 것도 황진이만이 가능한 착상이다. 물질이 아닌 시간을 무를 자르듯이 베어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 토막을 서리 서리 이불 속에 묻어 둔다는 표현은 놀라운 것이다. 임이 오시는 날 밤은 너무나 짧았다. 만단정회의 일단도 풀기 전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임이 없는 겨울 밤은 너무나 지루하고 길다. 그러니 이 밤을 베어 보관해 두었다가 임이 오시는 날 밤에다 이어서 그 밤을 길게 해 보겠다는 것이다. 서리서리 넣는 동작의 시름겨운 모습과 굽이굽이 펴는 신명나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것은 곧 임이 없을 때의 심경과 임을 다시 맞을 때의 심경을 동작으로 보여 준 것이다

황진이가 명창 이사종(李士宗)을 만난 것은 27 세 때였다. 이사종은 개성으로 선전관(宣傳官)의 벼슬을 하러 가는 길에 천수원(天壽院) 냇가에서 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진이는 그 노래의 뛰어남에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당대 명창 이사종 임을 알고 반가워했다. 두 명창은 곧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었다. 정이 든 두 사람은 이사종의 집에서 3 년, 진이의 집에서 3 년, 곧 6 년 동안 함께 살 것을 약속했다. 진이는 이사종의 집에서 이사종의 첩이 되는 예를 올리고 가산을 털어 3 년 동안 이사종의 집을 먹여 살리며 그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의 처자를 정성껏 돌보았다. 3 년이 지난 뒤 이사종이 진이가 한 것처럼 진이의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6 년이 되는 날 두 사람은 깨끗이 헤어졌다. 요즘 계약 결혼이라는 것이 있는데 황진이는 그 선구자였다
이렇게 미련 없이 헤어졌지만 황진이의 마음 속에는 오랫동안 이사종이 살아 있었다. 그 이사종이 몹시 그립던 어느 겨울 밤 황진이는 이 시조를 지었다. 황진이의 시조 6 수 가운데 이 시조가 첫째로 꼽힌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뉘앙스를 교묘하게 살린 작품으로 신운(神韻)이라 할 만하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변함이 없는 푸른 산은 나의 뜻이고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물은 임의 정과 같은 것이다. 물은 흘러가지만 산이야 변하겠는가. 그런데 흘러가는 물도 자기가 놀던 산을 그리워하여 울며 흘러가는구나
변함 없는 자세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청산은 자신의 마음이고 그러한 산을 버리고 흘러가는 푸른 물은 임의 정이다. 임이야 떠나가도 나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떠나가는 임도 나를 잊지 못해 울고 간다는 것이다
황진이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자기에게 정을 준 남자들이 결국 다 떠났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있을 것을 자신하는 것이다.
자기를 짝사랑하다 죽어 간 이름 모르는 이웃 총각을 비롯해서 지족도, 화담도,소 판서도, 이사종도, 벽계수도 다 떠나갔다.
그 중에는 유혹한 사람도 있고 존경한 사람도 있고 사랑한 사람도 있고 시와 술로 즐긴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떻던 다 떠나고 없다. 도도하던 황진이도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려서 그녀는 일장춘몽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 산이고 남자들은 흘러가는 물이다
보내고 그리는 정은.............


妓生の起源

『高麗史』によれば、高麗の太祖の時代〔10世紀〕に、百済(ペクチェ)の遺民たちのなかから容貌に優れ、才能のある女性を選び、歌舞を学ばせたのが、妓生の起源だという。彼女たちは八関会〔国と王室の安泰を祈願する儀式〕や燃燈会〔釈迦の誕生日に火を灯して福を祈る儀式〕などの行事や、外国から使臣を接待する場に動員された。朝鮮王朝の時代になると妓生制度が発達し、英祖の時代〔18世紀〕には“妓生”という用語も初めて使われた。そのため、一般的に妓生といえば朝鮮王朝時代の妓生を指す。

朝鮮王朝時代の妓生は、大きく官妓と私妓に分かれる。我々が知っている名妓のほとんどは官妓である。彼女たちは各地方から選ばれて、宮中の音楽と舞踊を管轄する掌楽院に所属し、そこで妓生となるために必要な言葉遣い、立ち居振る舞い、音楽、書画などを身につけた。官妓のうち地方の官妓を郷妓(ヒャンギ)と言うが、彼女たちの大半は官妓の母親の後を継いで自分も妓生になるケースが多かった。国の大きな行事や宴会があるときは、多くの郷妓が上京して、京妓とともに歌と舞を披露し、再び帰郷した。


妓生の等級

妓生の等級は一牌(イルペ)、二牌(イペ)、三牌(サンペ)に分かれていた。
一牌とは、宮中で女楽として御前で歌舞を披露する一級妓生のことで、高い地位にあった。二牌とは官庁や官僚の家に出入りする級の低い妓生で、“慇懃子(ウングンチャ=秘かに身を売る女性)”とも言われた。三牌とは身を売る酒場の酌婦を意味する最下流の妓生で、“搭仰謀利(タバンモリ)”、遊女とも呼ばれ、大部分が私妓だった。客を接待するときに雑歌などを歌ったが、その水準は一牌妓生の歌舞とは比べものにならなかった。

一方、病人の診察をする医女(ウィニョ)と宮中で衣服を仕立てる針婢(チンビ)も、宴会で妓生役を兼ねる場合が多かった。彼女たちはそれぞれ薬房(ヤクパン)妓生、尚房(サンバン)妓生と呼ばれたが、両房妓生〔薬房妓生と尚房妓生を合わせた言葉〕になるのは宰相になるより難しいとされ、妓生宰相とも呼ばれた。彼女たちの地位は相対的に非常に高く、後には“正三品”“従四品”などの官職を与えられる妓生もいた。


日本統治下の妓生

朝鮮王朝後期から社会が不安定になり、妓生と娼婦の区別が曖昧になり始めたが、本格的に官妓の伝統に変化が起きたのは、日帝強占期〔日本の植民地期〕からだ。1909年、“官妓制度”が廃止され、売春が合法化されて、誰でも金さえあれば妓生を買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また、下流妓生が娼婦化したため、伝統妓生全体が社会的な蔑視の対象に転落してしまった。

こうした過程のなかでも、妓生の伝統を引き継ぐための努力は続けられた。日韓併合の翌年である1911年、朝鮮正楽伝習所で妓生に歌と舞を教えた。これがわが国の妓生組合の始まりである茶洞(タドン)組合である。その後、このような妓生組合が各地に生まれた。だが妓生組合は、朝鮮総督府〔日本の朝鮮統治の最高機関。総督は天皇に直属し、陸海軍の大将から任命された〕によってその名称を日本式の“検番”〔待合や料理屋への芸者の取り次ぎや玉代の計算などを扱う事務所〕に変えられ、その目的も妓生の養成から商品の売買へと変質した。




妓生文化の伝承

日本の植民地からの解放後、妓生を売春婦のように公娼扱いする米軍政によって伝統妓生の存在は否定された。妓生養成の構造は完全に破壊され、その後継はほとんど断絶してしまった。ただ、ノンゲ(論介)〔16世紀の妓生。秀吉の朝鮮侵略で晋州城が陥落した際、日本の武将を道連れに川に身を投げた〕の故郷である慶尚南道(キョンサンナムド)晋州(チンジュ)では、その伝統が守られた。老いた妓生たちによってノンゲの功績を称える義妓彰烈会が結成され、検番出身の退妓たちが舞踊研究所を作って、晋州教坊の楽歌舞はかろうじて命脈を保った。その結果、晋州剣舞が1967年に国家指定重要無形文化財第12号に認定され、妓生文化が伝承されることになった。

妓生は、男性中心社会だった朝鮮の歴史において、女性の重要な足跡を残す契機を生み出した。また、伝統文化の継承者として芸術と文化発展に貢献した。これについて、『ファン・ジニ』〔ハヤカワ文庫〕を書いた小説家のキム・タクファン(金琸桓)氏は、「妓生は一生を通じて自己の完成を追求した芸術家であり、1910年代までは音楽、舞、詩、文筆にいたるまで独自の地位が認められていた」と評価する。

“解語花(ヘオファ)”-言葉を解する花-と呼ばれた妓生は、もはや存在しない。だが、時代と制度に押しつぶされた彼女たちの芸術的才能と、ファン・ジニの孤高、ノンゲの愛国心、ホンナン(洪娘)〔16世紀の妓生。節義に厚く、時調に優れていた〕の節操など、その象徴的なイメージは、現代人の脳裏にいまも息づいている。

「高大新聞」14999号 2005年2月27日(日) イム・ソンシル記者 (米津篤八・訳)





http://www.kukey.com/news/articleView.html?idxno=5185



예술을 꽃피운 '解語花' , 기생
역사속 여성의 발자취...일제 강점기부터 창부로 의미 왜곡돼
[1499호] 2005년 02월 27일 (일) 00:00:00 임성실 기자choin9s9@kunews.ac.kr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비유를 통해 노래한 이 시조는 역대 기생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황진이의 작품이다. 천민이었음에도 오늘날까지 황진이가 빼어난 여류시인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기생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은 판소리, 가야금, 궁중무 등을 배우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 예술적 재능을 선보였고, 지식인 남성들을 상대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때 백제 유민들 중에 외모가 특출나고 재주가 있는 여성을 뽑아 가무를 배우게 한 것이 기생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들은 팔관회와 연등회, 채붕과 같은 행사나 외국 사신을 응접하는 자리에 동원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기생제도가 발전해 자리를 굳혔고 기생이란 용어도 조선 영조 때 처음 쓰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생이라 하면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한다.

조선시대 기생은 크게 관기(官妓)와 사기(私妓)로 나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기는 대부분 관기이다. 그들은 각 지방에서 뽑혀, 궁중의 음악과 무용을 맡아보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생이 되는데 필요한 언어, 동작, 음악, 서화 등을 익혔다. 관기 가운데 따로 지방의 관기를 향기라 불렀는데, 이들은 대개 부모가 관기이기 때문에 자신도 기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의 큰 잔치인 진연·진찬·진작 때는 많은 향기들이 노래와 춤을 연주하기 위해 상경해서 경기와 함께 잔치행사를 치르고 다시 귀향했다.

기생은 일패·이패·삼패로 등급이 나뉘었다. 일패란 궁중에서 여악으로 어전에 나아가 가무를 하는 일급기생을 일컬었는데, 이들은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 은군자라고도 한다.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숨어서 매음하는 기생으로 대개 이들은 관리의 첩이 되곤 했다. 삼패는 탑앙모리, 유녀라고 불렀는데 몸을 파는 술집작부를 말하는 최하류 기생으로, 대부분 사기들이었다. 손님을 접대할 때 잡가 등을 부르기도 했으나, 일패기생의 가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한편 병을 진찰하는 의녀와 궁중에서 대궐의 의복을 짓는 침비도 연회를 위한 ‘기생’의 역할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각각 약방기생, 상방기생으로 불렸는데 양방기생은 재상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서 기생재상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아 나중에는 ‘정3품’ ‘종4품’ 등과 같이 관직명이 붙는 기생도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기생과 창부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관기의 전통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매춘이 합법화되면서 누구나 돈만 있으면 기생을 찾을 수 있었다. 또 하류 기생들이 창녀화되는 바람에 전통기생 전체가 사회적 경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속에서도 기생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나라 기생조합의 효시인 다동조합이며 이러한 기생조합은 이후 곳곳에 생겨난다. 그러나 기생조합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명칭이 일본식 교방의 이름인 권번으로 바뀌어 기생 양성의 목적이 상품의 매매로 변질됐다.

해방 후 기생을 매춘부와 같은 공창으로 취급을 하는 미군정에 의해 전통기생의 존재는 부정됐다. 기생의 재생산 구조는 완전히 파괴되고 그 후계는 거의 단절되고 말았다. 다만 진주에서 그 명맥이 이어졌다. 논개의 제향을 받드는 늙은 기생들에 의해 의기창렬회가 결성되고, 권번출신의 퇴기들에 의해 무용연구소가 생겨나 진주교방의 악가무를 겨우 이어갔다. 그 결과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공인받음으로써 기생문화의 전승구조가 갖춰졌다.

기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우리의 역사에서 여성의 중요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전통문화의 계승자로서 예술과 문화발전에 공헌했다 이에 ‘나, 황진이’를 쓴 소설가 김탁환씨는 “기생은 평생 자기완성을 추구한 예술가로 1910년대까지는 음악, 춤, 시와 문장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위치를 인정받았다”고 평가한다.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라 불리던 기생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시대와 제도가 허락지 않았던 그들의 예술적 재능과 황진이의 고고함, 논개의 애국심과 홍랑의 절개 등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현대인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http://blogs.yahoo.co.jp/ynz98ynz/50303487.html

『ファン・ジニ』原作に見る「鶴の舞」
2009/2/22(日) 午後 7:28ドラマ「ファン・ジニ」ドラマ番組




NHK海外ドラマ「ファン・ジニ」第17回は、鶴の舞をめぐるファン・ジニと師匠ペンムの葛藤が一つの山場になっていました。

ドラマでははっきりと描かれてはいませんが、キム・タクファンの原作小説では、ペンムはチニの母方の祖母の妹、という設定になっています。

小説では、黄真伊自らがペンムのことをこのように回想しています。

母方の祖母にはひとりきりの妹がいて、“セッキハルモニ”(訳注:子どものお祖母さんの意)と呼んでいました。本当の名は陳白舞(チン・ペンム)といい、松都(ソンド)随一の舞妓だったそうです。

行首(ヘンス)妓生まで務めたその外従祖母(おおおば)を、あえてセッキハルモニと呼ぶのは、年に比べてかなり若く見えたせいもありますが、いつも口癖のように「イセッキ(こいつ)、チョセッキ(あいつ)」と悪態をついて回っていたからです。

母の両親はふたりとも瘟疫(おんえき、腸チフスのこと)にかかって早くに亡くなったので、わたしの面倒を見るのは完全にセッキハルモニの役目でした。



ペンムは素晴らしい舞の才能を持ち、中国からの使臣も驚かせるほどです。

平壌を通って入ってくる大国(明国のこと)の使節を迎えるときは、セッキハルモニが自ら舞って見せました。若いころはその手並みが素晴らしいというので選ばれて漢陽に上り、掌楽院(宮中の歌舞を司る官庁)に学びましたが、そのときに本格的に手ほどきを受けたという呈才(チョンジェ、宮中儀式の舞)を舞うときは、春のかげろうを縫って乱れ飛ぶ蝶を見るようでした。……どうせ東方の田舎踊りと見くびっていた大国の使臣たちも、こぞって手拍子を打ち、嘆声を上げました。



そして「鶴の舞」については、次のようなエピソードが語られます。ここでペンムの鶴の舞に魅せられた東峯(トンボン)老人とは、世宗大王の寵愛を受けた文人、金時習(キム・シスプ)のことです。金時習は王室の内紛に憤って官職に就かず、各地を放浪した天才詩人でした。

関西(クァンソ、平安道のこと)への旅に出た東峯老人から教えを受けたこともありました。紫霞洞(チャハドン、松岳山のふもと)の瓦家に招いて十日十夜を楽しく過ごし、鶴の舞を作って披露したお礼に律詩を一首いただいたというのが自慢でした。あと一年は門を出ず、舞と詩に浸って過ごしたい。昨日も忘れ、今日も忘れ、明日も忘れた。そんなふうにも言っていたそうです。

その華麗な記憶にけちを付け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いま振り返ってセッキハルモニの詩を読むと、あまりに単調で韻が合わない部分が少なくありません。詩を吟ずる腕は優れていましたが、やはり詩妓(詩の才のある妓生)というより舞妓だったのでしょう。


さすがは黄真伊と言おうか、ペンムの舞を称えつつも、なかなか辛辣な批評をしています。

もちろん、これらのエピソードやペンムの存在は、すべて作家キム・タクファンの文学的想像の産物なのですが、膨大な歴史資料に基づいて、まるで黄真伊本人が語っているような作品に仕上がっています。(以上の引用はすべてハヤカワ文庫『ファン・ジニ』第1巻、 2章「危険な家系」より)


ところで、小説にはもう一箇所、「鶴の舞」が描かれています。

チニの学問の師だった徐敬徳 (ソ・ギョンドク)が、弟子たちとともに開城郊外にある朴淵の滝に散策にでかけた際、真理を悟り、そのうれしさのあまりに舞い踊るシーンです。

軽やかな滝の音が紅葉にさえぎられ、とぎれとぎれに聞こえるころ……まばゆい光が降り注ぐそこに、先生が立っ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いつも背に荷を負って、手足の動きをできるだけ小さく、端正にしていた先生が、両手を大きく振り、肩を揺すりながら、くるくると舞い踊っ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それは一羽の白鶴でした。

ひと月のあいだ考え続けていた温泉の原理を悟られたのです。……熾(おき)が炎を上げるように舞いに興じるほど、学ぶことがお好きだった先生の姿は、長く脳裏から消えませんでした。孔子と肩を並べてもいいほどではないでしょうか。学びて時にこれを習う、また楽しからずや。誰もが知っていながら実践するのは難しいその境地を、身をもって示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ハヤカワ文庫『ファン・ジニ』第2巻、 11章「学人の舞」より

ドラマ「ファン・ジニ」では、チニと徐敬徳との交遊についてあまり触れられていませんが、朝鮮中世を代表する学者の学問的情熱を描いたこの部分は、私が最も好きな場面のひとつです。


※絵はハヤカワ文庫『ファン・ジニ』の挿絵から、ペンムの舞「呈才(チョンジェ)」。

http://blogs.yahoo.co.jp/ynz98ynz/folder/1770378.html
http://blogs.yahoo.co.jp/ynz98ynz/34315289.html



黄真伊の詩(1)滿月臺懷古
2008/3/8(土) 午前 0:40ファン・ジニの詩小説


※写真は開城の満月台。背景の山は開城の象徴、松岳山【ソンアクサン】


黄真伊はいくつかの美しい漢詩と時調(朝鮮独特の定型詩)を書き残しています。
私が翻訳した『ファン・ジニ』から、そのいくつかを紹介していきます。

初回は開城【ケソン】の満月台【マノルテ】(高麗王朝の王宮跡)を謳った「滿月臺懷古」です。



滿月臺懷古(満月台を懐かしむ)

古寺蕭然傍御溝
夕陽喬木使人愁
烟霞冷落殘僧夢
歲月崢嶸破塔頭
黃鳳羽歸飛鳥雀
杜鵑花發牧羊牛
神松憶得繁華日
豈意如今春似秋

古寺はひっそり御溝【みかわ】の淵にたち
夕日が木々に映えれば、心は愁いに沈む
王宮は煙と消え、いまは僧の夢
崩れた塔が、険しい歳月を語る
鳳凰は飛び去り、遊ぶは雀だけ
つつじ咲く城跡は、牛と羊が草食むばかり
松都の栄華に思いをいたせば
春というのに、もう秋のよう


※注:松都【ソンド】は開城の古称

---早川文庫『ファン・ジニ』(1)p83収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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