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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30, 2012

discovered the list of "comfort women" belonged 16th UNC Koreans staying in 4th crown force unit,made in 1947

Kim Bok-dong (김복동) 김복동(金福童·79)

Korean Research Institute for Chongshindae*. (*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the list of the direct controlled Korean absence troop in 16th Headquarters


the 4th division of southern squad


Chosun Ilbo 2005/01/11 20:23


discovered the record that real name of former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Kim Bok-do.
Real name record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victims to survive has been discovered for the first time.

the researcher Kang Jonsuk in Korean Research Institute for Chongshindae*. (*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reported on 11th January that he found the real name of victim,ex-comfort woman ,Kim Bok-do (79) in the way of studying the military civilian materials in national record Institute.

in the contents, such as date of her birth and domicile of Kim seemed to be matched with her testimony included in "testimony 2 collection of Korean military comfort women who were forced taking" issued in 1997.

on this time discovered the civilian personnel roster which was created in September 1947, written as "fourth southern squad, 16th Army Headquarters under the direct control,the Korean troops away roster".

According to the record, it is to have been adopted Ms.Kim on August 31, 1945, she was 19 years old at the time,hit the lowest job grade of the civilian employees in the Southern Army 10th Military Hospital as a "Yonin;civilian employee".

Kim has made clear, "i was taken at the age of 15,i had lived as a ianfu; comfort woman for Japanese army in Guangdong of China, Malaysia, Indonesia, Singapore, " in "testimony collection" in 1997.


researcher Kang claimed that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he intention, the imperial japan tried hiding the system system comfort women for Japanese troops, to exploit Korean women's labor power, that it had hired korean woman as a nurse at the time of war was over"

she also is estimated " in civilian employee roster, there is remained the name of 299 korean women other than Kim, seemed have a large number of significant victims who were not registered as comfort women against country.




韓国挺身隊研究所の姜貞淑(カン・ジョンスク)
姜貞淑(Kang, Jeong-Sook)

第16軍司令部同直轄部隊朝鮮人留守名簿第4課南方班

朝鮮日報  2005/01/11 20:23

元日本軍慰安婦・金福童さんの実名記録が発見
生存する日本軍従軍慰安婦被害者の実名記録が初めて発見された。

韓国挺身隊研究所のカン・ジョンスク研究員は国家記録院の軍人軍属資料を調査途中、従軍慰安婦被害者の金福童(キム・ボクドン)さん(79)の実名記録を発見したと11日、明らかにした。

名簿に記載されている金さんの本籍や生年月日などの内容が挺身隊研究所が1997年に発行した『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の証言2集』に収録された金さんの証言と一致するという。

今回発見された軍属名簿は、1947年9月に作成されたもので、「第16軍司令部同直轄部隊朝鮮人留守名簿第4課南方班」と書かれている。

この記録によれば、1945年8月31日、当時19歳だった金さんが南方軍第10陸軍病院の軍属の中で最も低い職級にあたる「傭人」として採用されたとされている。金さんは97年の「証言集」で「15歳で連れて行かれ中国の広東、マレーシア、インドネシア、シンガポールで日本軍の慰安婦として生活した」と明らかにしている。

カン研究員は「戦争が終わった時点で朝鮮人女性を看護婦として雇ったことは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隠蔽、または最後まで朝鮮の女性労動力を収奪しようとした日帝の意図と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と主張した。

同研究員はまた「軍属名簿には金さん以外にも299人の朝鮮人女性の名前が残っており、国に慰安婦被害者として登録していない実際の被害女性がかなり多数いるものと見られる」と推定した。

同研究所のイ・ソンスク所長は「新年に入っただけでもキム・サンヒさん、キム・ブンソンさんが亡くなるなど、日本軍の慰安婦被害女性が相次いでこの世を去っており、この資料の持つ価値はそれだけに大きい」と話した。

韓国政府に登録されている日本軍の慰安婦被害女性は合計215人で、これまでに88人が亡くなった。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などが日本軍慰安婦に対する日本政府の公式謝罪と賠償を要求している中、この記録は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否認する日本右翼の主張を反駁し、日本政府の責任と賠償の義務を問う重要な根拠になると見られる。

キム・ユンドク記者 sion@chosun.com

http://chosonnews.txt-nifty.com/han/2005/01/post_2.html

the facts found from this article are the following two points.
(there is not of Kim's testimony in here)
1. the list had been created in September 1947.
2. Ms.Kim had been adopted as a civilian employee at the hospital on August 31, 1945.

The end of WW2 was the 15th August in 1945 as everyone knows.
someone tell me honestly the following points..

1. it is not unreasonable to be created after the war because it is out roster?
2. until October 16 in 1945, till MacArthur declared the dismantling of the Japanese army,it was able to adopt the civilian employees?

It is the result of thought to the article.
it would be a fierce suicide article if the above two points would not be right both.


この資料からわかったことは以下の2点です。(金さんの証言はこの資料ではない)

・この名簿は1947年9月に作成された。
・金さんは1945年8月31日に病院で軍属に採用された。

終戦は皆さんご存知の通り1945年8月15日です。
以下、正直わからないので詳しい方ご教授ください。

・留守名簿だから終戦後に作成されてもおかしくない?
・マッカーサーが日本軍の解体を宣言する1945年10月16日までは軍属採用できた?

がんばって記事寄りに考えた結果です。
上記2点が共に正しくなければ壮絶な自爆記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まぁ自爆だろうがそうでなかろうが、いずれにしろこの資料では日本軍による強制連行の証拠とはなりえませんけど。

カン研究員は「戦争が終わった時点で朝鮮人女性を看護婦として雇ったことは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隠蔽、または最後まで朝鮮の女性労動力を収奪しようとした日帝の意図と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と主張した。
朝鮮人女性を雇うと慰安婦制度を隠蔽することになるそうです。
もし私が隠蔽しようとするならば、看護婦として雇った日時を正確に記録に残さず、慰安婦として雇った日時にしますけど。

同研究員はまた「軍属名簿には金さん以外にも299人の朝鮮人女性の名前が残っており、国に慰安婦被害者として登録していない実際の被害女性がかなり多数いるものと見られる」と推定した。
普通に軍属だった女性も全て売春婦扱いですか。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などが日本軍慰安婦に対する日本政府の公式謝罪と賠償を要求している中、この記録は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否認する日本右翼の主張を反駁し、日本政府の責任と賠償の義務を問う重要な根拠になると見られる。
何度も申し上げて恐縮ですが、責任は日本軍による強制連行が立証されてから、賠償の請求は日韓基本条約を読み直して韓国政府に行ってください。

この記事は金さんが日本軍により強制連行された従軍慰安婦であったことを前提に書いていますが、その根拠はご本人の証言のみで客観的な証拠はありません。
そして結局今回発見された資料も全く慰安婦と関係ありませんでした。




従軍慰安婦問題にお詳しい方にはつま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逆転極東裁判 従軍慰安婦問題検証編というゲームがあります。気になる方は是非遊んでみてください。
私は元ネタであるゲームはやったことありませんでしたが大変面白く遊べました。続編(竹島?日本海?)を期待してます。



〈参加者たちの報告から〉 「慰安婦」問題-「真相究明が過去克服に」
真相とは「健全な社会的浄化の方法をもたらし、過去の再発を防止する」(国連・人権委員会報告書)と言われている。日本の現状は、過去の真相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望まれている。

「新しい歴史教科書を作る会」の教科書から「慰安婦」問題が削除された。この原因は真相究明を怠っているからだ。国立公文書館には、43万冊もの資料が保管されているが、このうち公開されているのはわずか35%の15万冊である。

自治省には戦前、戦中の警察・朝鮮総督府などを管轄した旧内務省の資料が放置され、その資料を積み上げると2万メートルにもなる。そのほか警察庁、防衛庁、外務省などにも大量の未公開資料があり、正式な公開はなされていない。

こうした限定的な状況であるが調査団は、「慰安婦」は「強制連行ではない」との主張を覆す資料を発見した。

1932年、長崎県の女性を「カフエーで働くいい仕事」と「だまして」中国上海の日本軍「慰安所」に連れて行った日本人斡旋業者に、刑法に基づき「有罪」とした最高裁判決(大審院1937年)を発見公表した。

当時、国際的にも日本の国内法でも「強制」とは肉体的、精神的強制が含まれていたのである。

強制連行の結果、多くの朝鮮人が亡くなったがその遺骨は、日本国内に半世紀以上も放置されている。

Japanese mediation skilled in the art in 1932, it took him a "good job to work at a coffee shop," "trick" the Japanese army in China Shanghai in the "comfort stations" a woman of Nagasaki, the Supreme Court, which was the "guilty" on the basis of the criminal law I have found published determine the (Grand Tribunal 1937).

At the time, physical and mental force is had included a "force" in domestic law of Japan and internationally.
A result of the forced entrainment, many Koreans died, but the remains are left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in Japan.


東京の「祐天寺」には、現在も1000体以上の遺骨が残されている。このうち確認されただけで、約350体は現在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出身の被害者である。ところが日本政府は、遺族への連絡も、その名簿すら公開を拒否する一方で、日本人「拉致」問題のみを主張している。この問題は、賠償、補償以前の人道的な問題である。(洪祥進、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事務局長)

[朝鮮新報 2004.10.23]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501/200501110444.html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 실명기록 발견
생존자중 처음… 1947년 군속명부 300명 이름 적혀, 배상 근거될 듯


▲ 강정숙 연구원이 지난해 11월 국가기 록원에서 처음 발견한‘조선인 제16군 사령부 동 직할부대 유수명부 제4과 남방반’의 표지. 한국정신대연구소 제공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실명기록이 처음 발견됐다.
강정숙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은 국가기록원의 군인군속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복동(金福童·79)씨의 실명 기록을 발견했다고 11일 밝혔다. 명부에 실린 김씨의 본적과 생년월일 등 신상내용이 정신대연구소가 1997년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 증언 2집’에 실린 김씨의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한 군속명부는 1947년 9월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인 제16군 사령부 동 직할부대 유수명부 제 4과 남방반’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31일 당시 19세였던 김씨가 남방군 제10 육군병원의 군속 가운데 가장 낮은 직급인 ‘용인’으로 채용된 것으로 나와 있다. 김씨는 97년 ‘증언집’에서 “15세에 끌려가 중국 광둥,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 강정숙 연구원이 발견한 군속명부에 김복동씨 한자이름과 당시 나이(21세), 본적(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동) 등이 적혀 있다. 한국정신대연구소 제공
군속명부에는 김복동 할머니 이외에도 1945년 8월 1~31일 싱가포르 등지에 있던 약 3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육군 제 5병원, 제 9병원, 제 10병원 등의 용인이나 임시 간호부로 채용된 기록이 있다.
강 연구원은 “전쟁이 끝난 시점에 조선인 여성들을 간호부로 고용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은폐하거나 마지막까지 조선의 여성 노동력을 편제수탈하려는 일제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군속명부에는 김복동 할머니 외에도 299명의 조선인 여성의 이름이 남아있어 국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지 않은 실제 피해여성들이 상당수 더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성숙 한국정신대연구소장은 “새해 들어서만 김상희 할머니, 김분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있어 이 자료가 갖는 가치는 그만큼 크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은 모두 215명으로 그동안 88명이 사망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는 가운데, 이 기록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인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과 배상의 의무를 묻는 중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입력 : 2005.01.11 18:12 03' / 수정 : 2005.01.11 18:47 03'



http://www.vop.co.kr/A00000017849.html


일본군 공식문서에서 위안부 실명기록 최초 발견

일본 정부에 책임과 배상 묻는 중요한 근거 될 듯

김도균 기자 vnews@vop.co.kr
입력 2005-01-11 16:35:27 l 수정 2005-01-11 19: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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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실명기록이 담긴 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돼 일본 정부에 책임과 배상 의무를 추궁하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신대연구소(소장 이성순) 강정숙 연구원은 국가기록원의 '군인군속자료'를 조사하던 중 군속명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실명기록을 발견했다고 11일 밝혔다.

이 군속명부에 나타난 김복동(79세) 할머니의 본적과 생년월일 등 신상 내용이 정신대연구소의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 증언2집(1997년 발간)에 실린 김 할머니의 증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연구소측은 설명했다.





△<1947 9="9"> `제 16군 사령부 동 직할부대 조선인 유수명부 제 4과 남방반\'이라고 적혀있다(좌)/ 자료에는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과 나이, 본적, 직급(용인) 등이 적혀있다(우) ⓒ사진제공 한국정신대연구소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위안소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일본군인들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싱가포르에 있는 제 10 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와 같은 여자들이 300명 정도 와 있었다." (증언2집 94-95쪽 중에서)

이번에 발견한 군속명부는 1947년 9월에 작성된 것으로 `제 16군 사령부 동 직할부대 조선인 유수명부 제 4과 남방반'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31일 당시 19세였던 김복동 할머니(1926년생)가 남방군 제 10 육군병원의 군속 가운데 가장 낮은 직급인 '용인'으로 채용되었다.

김 할머니는 15세에 끌려가 중국 광동,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성노예 상태에 있었다.

이 군속명부에는 김복동 할머니 이외에도 1945년 8월 1일부터 31일 사이, 싱가포르 등지에 있던 약 3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육군 제 5병원, 제 9병원, 제 10병원 등의 용인이나 임시간호부로 채용된 기록이 나와있다.


ⓒⓒ사진제공 한국정신대연구소
△군속명부에는 김 할머니의 이름 \'김복동\' 석자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명부에는 김 할머니 이외에도 1945년 8월, 싱가포르 등지에 있던 약 3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의 채용 기록이 나와있다 ⓒ사진제공 한국정신대연구소


강 연구원은 '간호부란 이름으로 위장돼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 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갖고 지난 해 5월부터 군속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해 같은 해 11월,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던 김 할머니의 이름을 최종 확인해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신대연구소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 왜 조선인 여성들을 간호부로 고용했는지 의문"이라며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은폐하거나 마지막까지 조선의 여성노동력을 편제수탈하려는 일제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어제 15세에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던 대구 김분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등 피해자가 속속 사망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자료는 사료적 가치는 물론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부인하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과 배상의 의무를 묻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도균 기자 vnews@vop.co.kr




http://plaza.rakuten.co.jp/obiekt/diary/200412280000/

on this time discovered the civilian personnel roster which was created in September 1947, written as "fourth southern squad, 16th Army Headquarters under the direct control,the Korean troops away roster".

oh my god!! the date! DATE!!
What it was in 1947 ..
the material was made in Korea!


i guess that the time of the end of WW2 was on 15th August 1945'.
made after two year the was defeated, whatever how much it is impossible.
or it is fake multiplied under the comfort women issue?


researcher Kang claimed that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he intention, the imperial japan  tried hiding the system system comfort women for Japanese troops, to exploit Korean women's labor power, that it had hired korean woman as a nurse at the time of war was over"

i guess it is good point too.
because it is a manifestation of intention "I will pay your salary" ...........
it was used to be possible even that pass over in silence of the chaos after the war.



カン研究員~!日付~日付~! キートンM さん
>1947年9月に作成され
>1945年8月31日、当時19歳だった金さんが南方軍第10陸軍病院の軍属の中で最も低い職級にあたる「傭人」として採用されたとされている。

…ごめんなさい、私はこんな時どんな顔をすれば(以下略)


(2005年01月11日 22時54分38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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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カン研究員~!日付~日付~!(01/11) JSF. さん
1947年・・・それって、韓国で作製された資料じゃん・・・なにこの自作自演。 (2005年01月11日 22時58分23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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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んて言うか 白庵 さん
( Д) ゚゚

終戦って1945年の8月15日じゃありませんでしたっけ?
敗戦の2年後って、いくらなんでも無理だと思うんですが。
慰安婦問題に乗じた捏造でしょうか? (2005年01月11日 22時58分24秒)
返事を書く

Re: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発見(01/11) 普段は軍板ROM さん
お節介かも知れませんが、元記事の

>カン研究員は「戦争が終わった時点で朝鮮人女性を
>看護婦として雇ったことは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隠蔽、
>または最後まで朝鮮の女性労動力を収奪しようとした
>日帝の意図と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と主張した。

という部分も引用してツッコミを入れた方がいいと思います。だって、戦争終わってから名簿作るって「給料払うよ」という意思の表れなんですから……。戦後の混乱で闇に葬ることだって可能だったのに。 (2005年01月11日 22時59分42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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う~む ヘリックス@ さん
作成年度ならGHQが作ったんならわかるけど……
証言との食い違いがねェ……
いくら本当の終戦が45年9月2日でもねぇ…… (2005年01月11日 23時00分14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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う~む・・・ 某S氏 さん
>中国の広東、マレーシア、インドネシア、シンガポール
-----
中国の広東は支那方面軍の担当区処だと思うがw
少なくとも東南アジア担当の南方軍の区処じゃないと思う。 (2005年01月11日 23時05分04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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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記録の日付って そーにゃ さん
ひょっとして漢数字で書かれてたんじゃ・・・?と思って画像を見たら、やっぱりそれっぽいですね。w
なんか、手持ちの駒が減ってしまった所に、新たな駒を得て喜んでらっしゃるようにも見えますね。>カン記者

(2005年01月11日 23時06分33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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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発見(01/11) キートンM さん
普段は軍板ROMさん

だって、戦争終わってから名簿作るって「給料払うよ」という意思の表れなんですから……。戦後の混乱で闇に葬ることだって可能だったのに。
-----
敗戦後を念頭においた措置として、敗戦前に名簿を作成したって言うならまだ理解出来るんですけどね。
ワルシャワ蜂起で降伏した地下組織に対し、
ドイツ軍がジェネーブ条約に則って捕虜として扱ったみたいに。 (2005年01月11日 23時21分07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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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発見(01/11) JSF. さん
普段は軍板ROMさん
>という部分も引用してツッコミを入れた方がいいと思います。

Да.
ツッコミを敢行してみました。
(2005年01月11日 23時28分24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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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まりは・・・ ますたーあじあ さん
従軍慰安婦にされた記録は日帝に焼かれたニダ< #`Д´>!!

ってことですよねw (2005年01月11日 23時48分12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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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それは… ありゃ りゃん さん
朝鮮半島近海の対馬海流・リマン海流・東支那海流及び大陸から張り出した高気圧の関係で、時間流が狂ってるんでしょう。
北鮮では「長髪の男性は脳味噌に栄養が行き渡らず、知能レベルが低い」とされていますが、コレは将軍様の仰る事だから事実と思われます。
この際に問題となるのは「頭髪の短い男性の知能レベルも等しく低い」事でしたが、この時間流の狂いが、人民に影響していると推測する事で、私的には問題を解決する事が出来ます。 (2005年01月12日 00時00分5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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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カン研究員~!日付~日付~!(01/11) 素人 さん
JSF.さん
>1947年・・・それって、韓国で作製された資料じゃん・・・なにこの自作自演。
-----
最新の韓国式ギャグでしょう・・・多分、きっと、おそらく。
(2005年01月12日 01時10分1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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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んというか・・・ しろくま さん
「嘘も百万回唱えれば真実になる」という言葉があるけどさすがにこれはならんだろう。
この記事書いた記者は自分の文章を推敲したのか? (2005年01月12日 01時10分2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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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らは常に斜め上をいく あばでま さん
>推敲
漢字は読めないニダ に変造500ウォン (2005年01月12日 02時11分04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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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ホや・・・・・ LEO さん

/ノ 0ヽ
_|___|_  / ̄ ̄ ̄ ̄ ̄ ̄ ̄ ̄ ̄ ̄ ̄ ̄ ̄ ̄ ̄ ̄ 
ヽ( # ゚Д゚)ノ < 貴様ら半島人は、等しく知能が低い!!
| 个 |    | 
ノ| ̄ ̄ヽ   \________________    
∪⌒∪     
(2005年01月12日 08時48分25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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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抜けな捏造ですね。 abusan さん
1947年と言えば完全に日本自体がGHQの占領下に
ある時期で間抜けな捏造としか言いようがありませんね。

まあ、こんな記事を嬉々として取り上げたら徹底的に
突っ込んでありますが、どうせ週刊金曜日レベルでしょう。

日本どころか世界から無視されてウヤムヤになるのがオチ
では無いですかね? (2005年01月12日 11時44分48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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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し書類が本物だったとしても バカの手先(以下略) さん
民間委託だった慰安婦をわざわざ軍属と偽る理由は一つもなく、つまり、「金某」なる自称売春婦の経歴が真っ赤な偽物と言う証拠になるだけでは? (2005年01月12日 17時20分44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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えーっと…… matsu さん
はじめまして。

「15歳で連れて行かれ」慰安婦にされた人が
「19歳」の時に「看護婦として雇」われたという記録が
「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否認する日本右翼の主張を反駁し、
日本政府の責任と賠償の義務を問う重要な根拠になる」???
ごめんなさい読解力がないので朝鮮日報の記事の意味が全くわかりませんorz

第一、被害女性の証言と問題の記録が「一致」している部分は
本籍地と生年月日だけのようなんですが。 (2005年01月12日 17時47分5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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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ういえば 蒼野青 さん
創氏改名は何処に行ったのでせうか?

『金』さん。 (2005年01月12日 18時37分21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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ギャグじゃないニダ CHF さん
これぞコリアンスタンダード。

ちゅうか、これがあの国で一番名のある報道機関なのが末期的。

・・・日本も似たようなもんか。 (2005年01月12日 18時55分40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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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たな事実発見!?(01/11) AN-94 さん
初めてここに書き込ますAN-94です。
上記の記事のことが中日新聞に載ってました。
しかし日付のことはのってませんでした・・。
なぜでしょう? (2005年01月12日 20時44分21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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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そういえば(01/11) 某S氏 さん
蒼野青さん
>創氏改名は何処に行ったのでせうか?

>『金』さん。
-----
www

一つ言い出せば次から次へとボロがw (2005年01月12日 20時46分2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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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たな事実発見!?(01/11) JSF. さん
AN-94さん
>上記の記事のことが中日新聞に載ってました。
>しかし日付のことはのってませんでした・・。
>なぜでしょう?
-----

さすがは中日新聞・・・しかしその行為は、この「新事実」とやらの馬鹿さ加減を証明する行為に他ならない。
(2005年01月12日 21時06分49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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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ムン ヘリックス@ さん
これが本当の黒歴史というわけか。 (2005年01月12日 21時33分07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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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従軍慰安婦問題、韓国で新たな事実発見!?(01/11) AN-94 さん
追加情報です。
上記の記事の名簿は

「1993年に日本政府から韓国政府に引き渡された資料の一つという。」

らしいです。
ソース:中日新聞1月12日朝刊より (2005年01月12日 22時16分12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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詳しい知識はないけども、・・ 素ー さん
「従軍慰安婦はあったという前提」で日本風に解釈すれば、
「慰安婦という形で帰すよりも、格好をつけて帰してやろうという思いやり」と想像できる。

ただ、ふつうに考えると、
終戦で日本軍相手の商売ができなくなった娼館が解雇して、本人は日本軍にもぐり込んだ。そのほうが安全確実に帰れるとも思ったかも。  

さらに、二年後に名簿を日本が作成したのが「朝鮮人留守名簿」とは、本人は帰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なのか? その辺を金さんは今までどう語っていたのだろうか?

(2005年01月14日 17時28分21秒)
返事を書く

あれです 慰安婦はイヤン さん
インターネットって素晴らしいですな。
つい最近まで従軍慰安婦が歴史的事実と思っていました。学校でうそ教えんなっ! (2005年02月01日 10時57分56秒)







歴史を否定することは 次世代から未来を奪うことです。
THE DENIAL OF HISTORY EQUATES WITH DENYING JAPAN’S YOUNGER GENERATION A FUTURE.
SEPTEMBER 26, 2012



ナショナリズム台頭の環境のなか、日本に良心のある人がいます。9月23日、大阪で慰安婦問題の集会に出席しました。妨害があったに関わらず、400人が参加しました。

講演のため、わざわざ 韓国から お越しになった強制連行された 金福童さんは86歳の高齢に関わらず、 張りの良い声で強制連行の事実を話してくださいました。 金さんによると、14歳のとき村の班長と「軍服のような服」を着た男に「軍服工場で働きなさい。そうしないと財産が没収される」と言われた。結果的に 工場どころか 14歳の少女 金福童さん が台湾経由で広東につれて行かれ、門の前に監視員がある、逃げることが出来ない 慰安婦所で毎日、毎日 平日は15人、週末は50人の兵隊を相手にさせられ、性的暴力を受け続けた。

その後、香港、シンガポール、スマトラ、インドネシア、マレーシア、ジャワへと軍隊とともに移動を続けた。

社民党の服部良一さんが 冒頭に素晴らしい挨拶をされました。歴史認識問題で 日本の将来はどうなるか と心配の声を上げました。

排外的な発言をする 大半の政治家の なかで良心がある政治家も居る!!少し安心しました。

元慰安婦で証言が出来る 人は後 数人しか生きていません。日本政府は彼女たちが死ぬのを待っているでしょう?

よく考えてみてください。加害者が何にもなかったように事実を否定続きながら横柄な態度で腕を振って堂々と歩いていく、被害者が事実を訴えつけないといけない状況は異常な状況ではありませんか。世界から これだけの根拠のある証拠が出ているなかで 日本はどうかしている。解決は正しい歴史の学びに限る問題です。

戦後、60年が経っても隣国に これだけ 反日運動が行われている事実に日本は自己反省をしなければいけないはず・・・

。。。。。。。。。。。。。。。。。。。。。。。。。。。。。
Despite the rise of nationalism in Japan, some people have a conscience. On 23rd September, I attended a rally for former comfort women in Osaka. Although right wingers tried to prevent the meeting there were 400 people in attendance.

Kim Bok-do, a former comfort woman of 86, came from Korea to the forum to bear witness to the atrocities committed by the Japanese army in WW2.

60 years ago and Japan’s politicians still regularly deny these women were cheated and forced into prostitution. How can a country ever be trusted again as a culture of denial fostered by ignorance continues to be tolerated?

In a compelling voice, Kim Bok-do told us how she came to be a comfort woman. When she was 14 years old, a (Korean) village official, accompanied by a Japanese and a person wearing an army uniform visited her parents. They were instructed their daughter would be sent to a sewing factory in Guangdong. If they refused, they would be blacklisted, their estate would be confiscated and they would be sent overseas. With no other choice they were coerced into letting their daughter go. The 14 year old Kim Bok-do passed through via Taiwan and eventually ended up in a comfort station in Guangdong, where she was repeatedly raped day after day; she was forced to service 15 men on a weekday and up to 50 men a day on a weekend. There were guards at the gate and it was impossible for her to escape. After Guangdong she was taken to Hong Kong, Singapore, Sumatra, Indonesia, Java. She travelled with the advancing army contingents and the artillery. The comfort stations were located close to the front lines.

At the beginning of the meeting the Shaminto (Social Democratic Party) member Ryoichi Hattori said a few words; after becoming accustomed to politicians who lie I wasn’t interested in hearing what he had to say. However, I was pleasantly surprised, he turned out to be a politician with a conscience, one who advocates the teaching of accurate history, and the need to reconcile with Japan’s past in order to give young Japanese a future. In Japan’s more recent xenophobic environment, a politician with a vision was reassuring. Unfortunately the majority of politicians are waiting for the comfort women to die so they can close a page on the “Japanese history book of denial.”

However, it won’t work, for the time Japan, although being responsible for past atrocities, will continue to be arrogant while victims despite, sufficient evidence must repeatedly plead their case. Isn’t there something fundamentally wrong with this state of affairs?

Unknowingly, while history is negated, the Japanese of this generation are denying the younger generations a future.

60 years after the war and Japan is still this distrusted? Why? The questions need to be answered by the Japanese themselves.



http://ryukyushimpo.jp/news/storyid-112579-storytopic-86.html

従軍慰安婦調査で来沖/韓国挺身隊研究所・姜さん
2000年6月23日

沖縄戦中の従軍慰安婦や慰安所について調査・研究をするため、韓国から韓国挺身隊研究所の姜貞淑(カン・ジョンスク)さん(44)が22日来沖、早速宜野湾市や西原町で調査を行った。
姜さんは、12月に東京で予定されている従軍慰安婦問題の責任を問う「国際戦犯法廷」(主催・「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で真相究明委員長を務めており、今回の来沖は日本軍のどの部隊が慰安所を管理していたかなど法廷に向けた基礎的な調査のため。7月2日まで滞在し、県公文書館、西表島や宮古島も訪問する予定。
通訳の藤岡羊子さん、1992年に県内の慰安所マップ作製にかかわった沖縄女性史を考える会の河名恵子さんの案内で宜野湾市と西原町のかつての慰安所跡などを訪ねた。
西原では、尚家の別荘で、戦時中は慰安所として使用されたといわれる同町小那覇の原野を視察。姜さんは「今ではその面影もなく、想像するのが難しい」と熱心にメモを取りながら語った。
宜野湾市嘉数高台では、日本軍が使用していたトーチカなどを視察。展望台で河名さんから、米軍の上陸から終戦までについて説明を受けた。その間も普天間飛行場から米軍機が離着陸を繰り返し、「米軍基地の存在という、現在沖縄が抱えている問題を肌に感じる」と印象を述べていた。






【金福童さんは「第15師団」ではなく「第18師団」の慰安婦だったという仮説】

来日した元慰安婦・金福童さんの証言を嘘だと攻撃する議論がかまびすしい。

年齢が証言と合わないとか、
彼女がついて行ったという日本軍第15師団は、
彼女が慰安婦をさせられたという場所に行っていないとか。

たしかに、第15師団は金福童さんの証言するマレーシアにもシンガポールにも行っていません。
ここに矛盾があることは、否定できません。
ここに記すのは、彼女がいたのは本人の証言する「第15師団」ではなく「第18師団」の慰安所ではないかという仮説です。

証言
「14歳のとき、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
「初めは広東に行った。」
「陸軍第15師団の本部について、台湾、広東、香港、マレーシア、スマトラ、インドネシア、ジャワ、シンガポール、バンコクと連れ回されました。」
「8年間、慰安婦にさせられました。」

■金福童さんの行動年表(仮説)

1926年
金福童さん生誕(第10陸軍病院作成の名簿にもとづく)。
数え年1歳

○証言
「14歳のとき、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
「初めは広東に行った。」

広東が占領されたのは1938年だから、彼女が慰安婦にされたのはそれ以後です。

1938年
日本軍、広東作戦開始。
参加部隊は「第18師団」、第104師団。
広東を占領し、日本軍の大部隊が駐留した。

1939年(金福童さん、数え年14歳)
広東の慰安所に入れられた。
証言と矛盾しません。 

○証言「陸軍第15師団の本部について、台湾、広東、香港、マレーシア、スマトラ、インドネシア、ジャワ、シンガポール、バンコクと連れ回されました。」

台湾→広東の順番になっている点から上るままに、順不同で並べたと思われます。
またスマトラとジャワは、インドネシアの内に含まれる地域名です。
インドネシアとは重複しています。

以下、上記地名が出て来るときに丸数字を振ります。

1941年11月
大本営がマレーシア攻略を含む南方作戦の作戦準備下令。
マレー作戦に動員されたのは「第18師団」、近衛師団、第5師団。
第18師団、渡航準備のため、広東から香港を経由して台湾に移動。
証言にある第15師団はマレー作戦に参加していません。

1941年12月
マレー作戦開始。
第18師団がバンコク進駐。

1941年12月
第25軍(第18師団、近衛師団、第5師団、第56師団)が編成され、マレー侵攻開始。

1942年2月
マレーシア全域を占領した。
シンガポール作戦開始。同、占領。
第18師団はシンガポールに駐留。

1943年5月
第18師団の所属する第25軍司令部がスマトラ島のブキッティンギに移駐(インドネシア)。
http://s.webry.info/sp/nemuihito.at.webry.info/200805/article_26.html

1944年3月 第7方面軍を編成。
隷下兵団は第16軍(ジャワ軍政)、第25軍(スマトラ軍政)、第29軍。

1945 9月
ジャワに本部があった上記第7方面隊第16軍に所属する第10陸軍病院の名簿に「傭人 金福童 19歳」との記録。
この年は満19歳にあたる。
(「第16軍司令部同直轄部隊朝鮮人留守名簿第4課南方班」)

その経緯は不明ながら、金福童さんはいつの間にか第25軍第18師団の下から、第16軍の下に移っていました。
このことは公文書に明らかです。

○証言「8年間、慰安婦をさせられた。」

1946年~1948
インドネシアから邦人が全員引揚げるのに、1948年まで足かけ3年かかっている。
数え年21~23歳にあたる。
帰国が1946年なら1939年から足かけ8年。
帰国が1947年なら満8年にあたる。

「1947年に日本軍は存在していない」などと下らない批判をする評論家もいますが、捕虜収容所で日本軍の階級秩序が機能していたことを無視しています。
こうして年表をつくってみると、金福童さんはどうやら第15師団ではなくて第18師団に随行していたように見えます。「第15師団」という証言が第18師団の記憶違いだと仮定すると、年齢にも経歴にも、まったく矛盾しません。すべての地名が部隊行動と符号します。
Unknown (Unknown)
2013-06-01 23:04:16
か・・・数え年??
ま、記憶違いはあるでしょう。

1947年に日本軍の階級秩序が仮にあったとしても既に敗戦後です。
慰安所を管理することもましてや慰安婦を手配することなど到底不可能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祖父は帝国海軍軍人でしたが、そんなことができるような状態
ではなかったと聞いています。
今回の金さんが慰安婦ならそれはそれでまぁいろいろあったのでしょう。
否定もしませんよ。本人にしかわからないし。
ただやはり国として
「軍がレイプしたり強制的に連れてきて慰安婦した」事実はない。証拠もない。

問題はその金さんが慰安婦であったかどうかではなく、
「軍による強制」があったかどうか。

上にいろんな方が書いておられますが、精神科医さんの証拠のコピペにそれを証明する記述が見当たらない。
まぁ要点もまとめられていないからあなたが一体なにを言いたいのかさっぱりわからんのですけどね。

あと、今回のドタキャンも失礼な行為ですよね。
で、関西ネットワークの変なキレ方。もう怪しさしかみえない。(笑)
自分で会いに行きたいっていうから橋下さん側はセットしたのに、
勝手にドタキャンした挙句日本中ツアーで回って陰口叩いているようにしか見えない。
「会う価値もない」・・・・????
ならなぜ来日した?正々堂々と言えないなら早く帰って欲しい。
これだけ日本の国民感情を逆撫でしておいてそれでも擁護するおつもりですか?

それと、上の書きこみ
ネトウヨさん?我々がネトウヨさんと上から目線で言われるならあなたはブサヨさんでよいでしょうか?
ご確認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精神科医 (宮地 達夫)
2013-06-02 17:14:02
Unknown (Unknown)さん。父上が帝国海軍軍人だったとの事ですが、下の証言は日本陸軍のものであり、管轄が違います。橋下との面会を断ったのは、彼の2転3転する言動からして都合良く政治的に利用されるという判断からで,逃げたわけではない。橋下の発言が全文引用されているMLがあって皆さん喜んでいたけど、自己矛盾で一杯で痛々しい 以下資料
日本の敗戦後、日本や朝鮮半島などから中国や東南アジア各地に送られた「慰安婦」たちがどのように扱われたのか、ということは大きな問題である。現地で放置された女性もいれば、とりあえずは日本や朝鮮半島に戻ることができた女性もいた。
戦後、日本軍が作成した文書のなかに、朝鮮女性が敗戦前後に看護婦として登録されたことを示すものがある。金福童さんも、敗戦時に看護婦としての訓練を受けている。金福童さんは陸軍病院に配属されたようだが、ここで紹介するのは海軍について、日本人「慰安婦」を病院の補助看護婦にするように命令したこと、ならびにそうした措置をとったことを示す海軍の電報である。いずれもイギリス軍が日本海軍電報を傍受し、暗号解読をおこなって英訳したものである。その英訳から原文の日本語を推測して訳したものである[1]。
一九四五年八月一八日一一時二一分
発信者 第一南遣艦隊司令長官(参謀長) 
宛先 第11特別根拠地隊(サイゴン)、第13特別根拠地隊(ラングーン)、第15特別根拠地隊(ペナン)
シンガポールの海軍「慰安施設」に関して、八月一日付で日本人従業員は海軍第一〇一病院で雇用されることとなった。少女たちの多くは補助看護婦とされた。これと同様の措置をとるべし。(写真)
 一九四五年八月二〇日一九時一五分
発信者   第八通信隊 
宛先 すべての民政部長官
全地区の日本女性を各地区の病院(第一〇二病院の支部または民政部病院)に看護婦として配属すべし(旧例に従って取り扱うべし)。しかしながら、スラバヤとジャカルタは特別命令に従って扱うべし。完全に了解すればこの電文は焼却せよ。

  前者は、シンガポールに司令部を置いていた第一南遣艦隊の命令であり、その指揮下のマレー半島、インドシナ、ビルマなどの部隊に伝達されたものである。ここでは、シンガポールにおいては八月一日付で日本人「慰安婦」を看護婦にしたことが報告され、ほかでも同様の措置を取るように命じている。ここでいう「日本人」とは金福童さんなどの例から考えると、朝鮮人女性も含まれていると見てよいだろう。
後者は、インドシネア第二南遣艦隊の指揮下にあった通信隊からのもので、占領地行政を担当していた各地の海軍民政部(軍政機関)に宛てた電報である。インドネシアの海軍占領地では民政部が慰安所を管理していたので、民政部長官宛になっていると思われる。
海軍の指揮命令系統で見ると、大本営海軍部―連合艦隊―第一〇方面艦隊―第一・第二南遣艦隊となる。この二つの艦隊でフィリピンを除く東南アジア地域全域を担当していた。したがって、この二つの電報から、ほとんど米軍に占領され海軍組織が実質的に解体していたフィリピンを除いて、海軍については東南アジアのほぼ全域で、同様の措置を取るように命令が出されていたと見てよいだろう。
南方軍の「留守名簿」によると[2]、韓丁洙という朝鮮女性が四五年八月一日付で「看護婦」として「発令」されている。この女性は第五陸軍病院の「留守名簿」に記載されており、第五病院はジャカルタにあったのだが、その後、その女性はシンガポールで病死している。現在、シンガポールの日本人墓地に南方軍の「病院関係物故者」氏名一覧が刻まれた碑が建っており、その一覧のなかに彼女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写真)。彼女が慰安婦だったかどうかは断定できないが、その可能性は高い[3]。これは記念碑であってお墓ではないが、「慰安婦」だったとすれば、こうした碑に名前が刻まれているのは非常に珍しいケースだろう。
いずれにせよシンガポールでは八月一日付で看護婦として登録したとの電報の内容は留守名簿によって裏付けられたと言ってよい。電報は海軍のものであるが陸軍も同じ措置を取ったと見られる。金福童さんの場合は、陸軍第一〇病院に八月三一日付で「雇人」になっている。この病院はスマトラにあった[4]。後者の電報ではシンガポールでの措置にならって各地でも同様の措置を取るように命令しているが、それによってとられた措置だろう。
日本陸軍の「留守名簿」を調査した姜貞淑氏の論文によると、そこに「看護婦」や「雇人」などとして記載が確認された朝鮮人女性三一四人のうち、四五年八月一日付で登録された者八三人、ほかは一一日5人、二二日八七人、三〇日三五人、三一日一〇四人、となっている。
八月一日付でなされた措置が、実際にはいつなされたのか、特に敗戦前か後か、というのははっきりとはわからない。敗戦がわかってから、元々看護婦だったという体裁を取り繕った可能性が高いと思われるが、それは遅くとも八月一八日午前中までになされたことは確実である。
こうした措置を取った意図は電報には書かれていないので推測するしかないが、一つには日本軍が慰安所を持っていたこと、ならびに慰安婦の存在を隠蔽しようと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もう一つは、連合軍に武装解除される際に軍人軍属の登録がおこなわれるだろうが、その際に日本人「慰安婦」の扱いに困り、看護婦であれば軍属にできるので(事実、留守名簿に記載されている)、そのように登録して一緒に帰国する便を図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推測も可能かもしれない[5]。 
この「留守名簿」については、姜貞淑「解放以後に日本軍は朝鮮人の軍慰安婦を軍属で採用」(挺身隊研究所News Letter、第五八号、二〇〇五年一月)、参照。
精神科医 (宮地 達夫)
2013-06-02 17:17:25
姜貞淑(ガンジョンスクさん発見の資料
終戦間際には戦地の病院で看護に従事させられたことにも触れ、「日本の慰安婦を隠すため私たちは看護婦に仕立てあげられた。日本兵の手術には私たちの血を使い輸血までさせられた。当時の写真もあり、強制連行の証拠が無いとは言えない」と慰安婦の処遇に国が深く関わっていたことを証言した。姜貞淑(ガンジョンスク)韓国挺身隊研究所の研究者は、国家記録院の軍人軍属のデータを調査した中、日本軍慰安婦被害生存者ギムボクドン(金福童•79)さんの実名記録を発見した(…)今回発見された軍属のリストは、1947年9月に作成されたもので '朝鮮第16軍司令部同直轄部隊有数リスト第4の南方の半分 "と書かれている。この記録によると、1945年8月31日、当時19歳だった金さんが南方軍第10陸軍病院の軍属の中で最も低い階級である "容認"に採用されたものと出ている。(…)軍属のリストには、ギムボクドン祖母以外にも、1945年8月1~31日、シンガポールなどにあった約300人の朝鮮人女性が陸軍第5病院、第9病院、第10病院などの容認や一時的な看護婦に採用された記録がある。
川研究員は、 "戦争が終わった時点で朝鮮人女性を看護婦として雇用したのは日本軍慰安婦制度を隠蔽したり、最後まで朝鮮の女性労働力を編成収奪しようとする日本の意図に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と主張した。日本が第二次世界大戦で敗北すると日本軍慰安婦を軍病院の看護助手として緊急雇用するよう命令を下し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と教(共同)通信が20日報道した。日本軍が慰安婦を看護師に切り替えるように指示した経緯が直接確認されたのは初めてだ。このような内容は、連合国側が暗号解読により確認したもので関東(关东)大学院大学の林博文(林博史)教授は、英国の公立文書館で発見したと共同通信は伝えた。日本軍の蛮行を研究してきた専門家たちは、慰安婦が看護師に雇用され、身分も軍務に変化した可能性が高いと見ている。性的奴隷として振るった慰安婦の軍務に変身させ、連合軍側に慰安婦の存在を隠蔽するための措置だったという。今回発見された文書によると、慰安婦を看護師に転換させる措置は、東南アジア地域に派遣されていた第1ナムギョン(南遣)艦隊司令官がサイゴン第1特別基づい地帯などを受信者にして、1945年8月18日に送信した通知で明らかになった。この通知は、 "シンガポール日本海軍の慰安施設で働いていた少女たちが海軍第101病院で看護助手として採用された"と指摘し、 "サイゴンでも同様の措置をせよ"と指示している。また、第8通信大学で海軍民政府(民政部)前責任者に送信され、同月20日の通知には、 "前の日本女性を看護師資格で病院に割り当てなさい"と指示した。通知は、続いて"通知の全文を完全に理解した後に焼却しなさい"と明示した。私は陸軍15師団の本部に連れられて戦場を行き来しました。戦争が終わったことも知らされませんでした。最後まで「慰安婦」というものを隠して私たちのことを看護師だとウソをついて第16軍病院で訓練を受けさせられました。そのような経験をしてやっと国が解放されたことを知りました。日本軍は先に撤去してしまって私たちだけが残りました。米軍が上陸して米軍の収容所に収容されました。そこで全てのことを調べられて調査を受けて調査が終わった時点でやっと韓国に帰ってく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精神科医 (宮地 達夫)
2013-06-02 17:32:21
2013-05-29 14:29:45 Unknown (Unknown)さんのレスに「中国のチベット族やウイグル族 3人集まると即懲罰の対象に」とする記事がありましたが失念してレスを怠りましたので遅まきながらお答えします。但し何故、おいきなり、慰安婦問題を論ずるなかUnknown (Unknown)さんが、チベット族やウイグル族の問題を 持ち出したのかの理由は分かりません
中国は旧ソ連と同じくスターリン主義国家で、スターリンは、民族自決の原則を抑圧し少数民族独立運動を徹底的に弾圧した。チェチェンの独立運動もスターリン死後も弾圧している。中国の少数民族独立運動弾圧もその「伝統」にそったもの。以上



http://blog.goo.ne.jp/harumi-s_2005/e/3f9eaea3b2b97a481e640b53524d065d

【金福童さんは「第15師団」ではなく「第18師団」の慰安婦だったという仮説】

来日した元慰安婦・金福童さんの証言を嘘だと攻撃する議論がかまびすしい。

年齢が証言と合わないとか、
彼女がついて行ったという日本軍第15師団は、
彼女が慰安婦をさせられたという場所に行っていないとか。

たしかに、第15師団は金福童さんの証言するマレーシアにもシンガポールにも行っていません。
ここに矛盾があることは、否定できません。
ここに記すのは、彼女がいたのは本人の証言する「第15師団」ではなく「第18師団」の慰安所ではないかという仮説です。

証言
「14歳のとき、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
「初めは広東に行った。」
「陸軍第15師団の本部について、台湾、広東、香港、マレーシア、スマトラ、インドネシア、ジャワ、シンガポール、バンコクと連れ回されました。」
「8年間、慰安婦にさせられました。」


a hypothesis, Mrs.Kim Bok-do was a comfort woman of "18th Division" instead of "15th Division"

it is boisterous discussion to attack against the testimony of former comfort woman Mrs.Kim Bok-do who came Japan as a lie.

such as her age was  not match her testimony,
the Japanese Army 15th Division that she was carried out, they did not go such  a place where she was forced to be a sex slave.

Indeed, the 15th Division did not conduct even in Singapore nor Malaysia,against of Mrs.Kim bokdo issued in her testimony.
there is a contradiction here, it can not be denied.

The referred to here,  it its the hypothesis that she had stayed in the comfort station of "18th Division" rather than from her testimony of "15th Division".

her testimonies.
"when i was at the age of 14, i was taken to the comfort station"
"at firstly, i went to Guangdong"
"following to the headquarters of the 15th Army Division,i was taken around to Taiwan, Guangdong, Hong Kong, Malaysia, Sumatra, Java, Indonesia, Singapore, and Bangkok"
"i had been being a comfort woman for eight years"

■金福童さんの行動年表(仮説)

1926年
金福童さん生誕(第10陸軍病院作成の名簿にもとづく)。
数え年1歳

○証言
「14歳のとき、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
「初めは広東に行った。」

広東が占領されたのは1938年だから、彼女が慰安婦にされたのはそれ以後です。

1938年
日本軍、広東作戦開始。
参加部隊は「第18師団」、第104師団。
広東を占領し、日本軍の大部隊が駐留した。

1939年(金福童さん、数え年14歳)
広東の慰安所に入れられた。
証言と矛盾しません。 

○証言「陸軍第15師団の本部について、台湾、広東、香港、マレーシア、スマトラ、インドネシア、ジャワ、シンガポール、バンコクと連れ回されました。」

台湾→広東の順番になっている点から上るままに、順不同で並べたと思われます。
またスマトラとジャワは、インドネシアの内に含まれる地域名です。
インドネシアとは重複しています。

以下、上記地名が出て来るときに丸数字を振ります。

1941年11月
大本営がマレーシア攻略を含む南方作戦の作戦準備下令。
マレー作戦に動員されたのは「第18師団」、近衛師団、第5師団。
第18師団、渡航準備のため、広東から香港を経由して台湾に移動。
証言にある第15師団はマレー作戦に参加していません。

1941年12月
マレー作戦開始。
第18師団がバンコク進駐。

1941年12月
第25軍(第18師団、近衛師団、第5師団、第56師団)が編成され、マレー侵攻開始。

1942年2月
マレーシア全域を占領した。
シンガポール作戦開始。同、占領。
第18師団はシンガポールに駐留。

1943年5月
第18師団の所属する第25軍司令部がスマトラ島のブキッティンギに移駐(インドネシア)。
http://s.webry.info/sp/nemuihito.at.webry.info/200805/article_26.html

1944年3月 第7方面軍を編成。
隷下兵団は第16軍(ジャワ軍政)、第25軍(スマトラ軍政)、第29軍。

1945 9月
ジャワに本部があった上記第7方面隊第16軍に所属する第10陸軍病院の名簿に「傭人 金福童 19歳」との記録。
この年は満19歳にあたる。
(「第16軍司令部同直轄部隊朝鮮人留守名簿第4課南方班」)

その経緯は不明ながら、金福童さんはいつの間にか第25軍第18師団の下から、第16軍の下に移っていました。
このことは公文書に明らかです。

○証言「8年間、慰安婦をさせられた。」

1946年~1948
インドネシアから邦人が全員引揚げるのに、1948年まで足かけ3年かかっている。
数え年21~23歳にあたる。
帰国が1946年なら1939年から足かけ8年。
帰国が1947年なら満8年にあたる。

「1947年に日本軍は存在していない」などと下らない批判をする評論家もいますが、捕虜収容所で日本軍の階級秩序が機能していたことを無視しています。
こうして年表をつくってみると、金福童さんはどうやら第15師団ではなくて第18師団に随行していたように見えます。「第15師団」という証言が第18師団の記憶違いだと仮定すると、年齢にも経歴にも、まったく矛盾しません。すべての地名が部隊行動と符号します。


Arirang Prime Ep179 The Wednesday Women 수요일의 여인들


2014/02/12 に公開
The Wednesday Women
In front of the Embassy of Japan in Jongno-gu, a group of women gathers every Wednesday.

About 200,000 Joseon girls were forc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army when they were still in their teens. We call them "comfort women."

Now, the young Joseon girls are white-haired women who gather in front of the Embassy of Japan every Wednesday. For the past 21 years, the Wednesday rally has been demanding an apology and a compens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with the help of the civilians and international support.

Huruyashi Aya has been participating in the rally for 7 years.
She visits Lee Yong-su in Daegu and listens to her painful story.

Comfort women survivors are now fighting to bring their story under the global attention. Lee Yong-su and Kim Bok-dong visit Washington for the fifth anniversary of the Comfort Women Resolution that was passed by the U.S. House of Representatives on July 30, 2007. It was one of the significant steps taken by the U.S. to resolve the comfort women issue. In 2010, the Palisades Park in New Jersey even set up a memorial for the comfort women and recently,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stated that the euphemism "comfort women" should be replaced with "enforced sex slaves."

The comfort women issue is a violation of women's right that has shocked and angered not only the countries involved but also the whole global community.

Japanese women who are publicly apologizing to the abused women.
Tom Rainy Smith, a docent from New Zealand who works at a museum that keeps a record of the history of comfort women.
Sato Yukie, a Japanese singer who heard about comfort women from his father who fought in WW2.
Tammy Chu, who is sending a message to the world with her documentary on comfort women.

Why are they sharing the pains of the comfort women and crying out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re are 234 comfort women recorded in the official file.
Only 60 survivors remain as of 2012.

Time is running out for them.
Their voices have been ringing for too long. We look for a light of hope and a global response.

수요일의 여인들
서울 종로구의 일본대사관 앞, 매 주 수요일이면 만날 수 있는 여인들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씻지못할 상처를 입은 위안부라 불리는 그녀들.
꽃도 피우기 전 10대의 나이로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를 강요당했던 조선의 소녀들은 20만명으로 추정.

조선의 소녀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 수요일마다 이 곳을 지킨다. 21년째 이어지고 있는 수요집회는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투쟁의 현장이자 시민들, 국제적인 동참이 이뤄지는 화합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7년째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일본인 후루야시 아야.
평소 안면이 있는 이용수 할머니를 찾아 대구로 찾아간다.
할머니의 깊은 상처를 들은 아야는 "일본인인 자신이 부끄럽다"고 하는데..

할머니들은 이제 피해자가 아닌 투쟁자로 전 세계를 향해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 7월 30일, 2007년 미 하원에서의 결의안 채택 기념행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이용수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 미국이 한국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 심지어, 2010년 10월에는 미국 펠리세이즈파크시에 위안부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기림비가 처음 세워진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얼마전, 힐러리 국무장관은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일본군에 의한 강요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고 표현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위안부 문제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 여성인권 침해라는 측면에서 전 세계인이 공감하고 때론 함께 슬퍼하고,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집회를 하고있는
주한일본여성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흔적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 투어를 하며 국제적 연대로 투쟁하고 있는 뉴질랜드인 톰 레이니 스미스씨.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한국의 위안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로 전하고 있는 일본인 사토 유키에씨. 3년간에 걸쳐 제작한 위안부 할머니들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로 전 세계로 메시지를 전하는 태미 추씨. 이들은 왜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 가슴깊이 슬퍼하고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걸까.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수 234명.
2012년 현재 생존자 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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